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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그날

재회......

by 늘 담담하게


처음에는 그곳을 들르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오랜만에 손 세차를 하려고 세차장에 들렀을 때, 차가 밀려 한 시간 정도 걸리겠다고 해서, 딱히 갈 곳도 없어서 학교 안으로 들어갔고 걷다 보니 내가 다니던 경영대 쪽으로 갔고, 그때서야, 그녀가 주인이라는 클래식 음악 카페가 인문대 쪽문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경영대에서 인문대는 바로 옆이고, 그 쪽문도 가까웠다. 나는 어찌할까 생각하다가 그 쪽문으로 나갔고 2층에 있는 그 카페로 올라갔다. 예상과는 달리 어떤 설렘 같은 것은 없었다. 나는 천천히 카페의 문을 열었다.


그 문을 열었을 때 순간적으로 나는 내 마음속의 기억창고의 문을 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몇 명의 손님이 앉아 있을 뿐 한산했다. 나는 햇빛이 잘 드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그 자리에서는 창문을 통해 인문대의 뒤편이 훤히 보였다. 자리에 앉자 바로 여성이 내게 다가왔다. 혼자냐고 묻는 그녀.. 긴 세월의 흔적이 얼굴에 남겨져 있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누군인지 알지 못했다. 아니 나란 사람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녀가 불문학과생이었고 나는 경제학과생이었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굳이 그녀와의 연결점을 찾아보라고 한다면, 그녀는 고등학교 동창생의 첫 미팅 상대였고, 그녀의 아버지가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교사로서 근무하셨고, 내 후배의 합창부 선배였으며, 나의 초등학교 동창생이 그녀와는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것 정도..(그녀가 그곳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고 알려준 것도 그 초등 동창생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 하나 직접적인 것은 없고 한 다리 건너 누구 식으로 연결되는 것뿐이었다. 그저 같은 대학을 다녔다는 것 이외에는 제대로 설명할 것이 없고 그마저도 3학년 1학기가 끝난 뒤 나는 입대를 했고 그녀는 그 사이에 졸업을 했으며 일찍 결혼을 했다. 제대를 하고 다시 복학을 했지만 졸업 후 나는 서울로 올라가, 직장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대학 3학년 이후, 그리고 제대 후에 길거리에서 우연히 본 것 외에는 그 어떤 만남도 없이 살아왔다. 심지어는 차를 주문하고 계산을 할 때 나눈 대화도 그녀와 나는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녀와의 인연을 아름답게 포장할 수도 없고 아련하게 떠올릴 것도 없다. 하지만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나는 이제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는 기억 창고 속 어딘가에 담겨 있던 옛 기억들을 꺼내어 볼 수 있었다. 스무 살의 그 시절, 돌이켜보면 행복하기도 했지만 좌절과 고통, 상처가 많았던 그 날들..




꺼내어 보는 것조차 힘들었던 시절이 지나고 나서, 이제는 담담하게 그 시절들을 다시 되돌아볼 수 있을 때가 되었기에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었고 그녀는 나를 알지 못하지만 따뜻한 차 한잔을 마시며 옛 일을 떠올려 볼 수 있었다.


지금은 그저 아련한 수채화 빛 기억으로 남아 있던 첫사랑의 그녀가 그 기억 상자 속에 있었고, 그와 더불어 카페의 그녀 또한 그 속에 담겨 있었다.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그녀는 봄날 경영대 앞을 지나가던 모습이다.


키가 컸고, 얼굴도 갸름한 미인형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남학생들의 시선을 그녀에게 쏠렸다. 주문한 차를 가져다주는 그녀, 세월은 흘렀지만 그 미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처음 그곳을 가르쳐준 친구는 그곳에 가서 누구의 친구라고 말하면서, 예전에 바로 옆 경영대를 다녔다고 말하라고 했지만 나는 그 이야기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이제 와서, 그 시절을 이야기한들, 그녀는 아 네.. 그러세요 정도밖에 말할 수 없을 테고,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에 함께 한 기억이 없으므로 바로 어색해질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기억 창고에 있는 상자들에 담긴 그 많은 이야기들... 지금도 소식이 닿은 이가 있겠지만 많은 이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없다.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이 지나갔다. 겨울 답지 않는 따뜻한 오후의 햇살이 창으로 길게 들어올 무렵 나는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정말 오랜만에 꺼내 보았던 기억들을 다시 상자 속에 담아두고, 창고의 어디쯤에 배열된 시간의 순서대로 끼워 놓아야 했다.


계산을 하고 난 뒤 나는 카페를 나왔고, 오래전 그녀와 내가 걸었던 교정을 천천히 걸어갔다.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면서... 담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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