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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 Aug 19. 2024

시민교육 교수님

중학교 때부터 공부는 잘하지 못하지만 노력하는 아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공부도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선 공부를 더 집중할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고 수업은 예를 들어 6교시라면 6교시 중 무용 수업이 2~3개를 차지할 정도로 실기 수업 비중이 높았으며 학교 정규 수업이 끝나고도 이어지는 방과 후 수업이 9시까지 있으므로 새벽이나 밤늦은 시간 빼곤 따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은 구조였다. 하지만 이때도 마찬가지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했다. 새벽 시간에 나가 공부했고 방과 후엔 도서관이 열려있는 시간까지 공부했다. 고등학교의 도서관은 하필 맨 꼭대기 층이었고 우리가 방과 후가 끝나는 곳은 지하 1층 (혹은 1층)이었다. 방과 후가 끝나면 보통 땀범벅에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닌 느낌이 드는데 무용 가방과 교과서, 문제집을 이고 지고 지하 1층에서 맨 꼭대기 층까지 걸어 올라가기란 정말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늘 도서관까지 올라가 공부했다.


무용과이지만 공부를 꽤 즐기며 했던 학생이었다. 공부에 흥미가 있기도 했고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상한 마인드가 하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무용과는 공부 못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싶은 이상한 오기가 이었다. 특히 대학에 들어와 무용과는 공부 못 한다고 생각하는 친구들 혹은 교수님들께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1학년 초 발표를 해야 하는 수업 같은 경우 자처해서 했다. 물론 다른 일반 친구들과는 어느 정도 배움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못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잘할 수 있는 것들을 최선을 다해 참여했다. 


그러던 중 필수 교양 수업인 시민교육이라는 수업을 듣게 되었다. 다들 재미없는 수업이라고 했지만 나름 재미있었고 교수님께서는 강의를 정말 잘 전달해 주셨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중간고사 날이 되었다. 중간고사의 주제는 시민교육에서 다루는 자유, 평등 그리고 학자들의 이론과 사상을 연결 지어 자신의 이야기를 2장 제출하는 것이었다. 학자들의 사상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고 다른 친구들과는 알고 있는 지식과 정보가 현저히 차이가 나는 것을 알았기에 나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시민교육에서의 가장 큰 키워드인 자유, 평등에 빗대어 쓰기로 하였다. 정확히 1장의 이야기가 써졌고 아무리 봐도 이보다 더 명료하고 확실하게 내 생각을 전달하는 글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원래 분량은 2장이지만 1장만 쓰고 연필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다른 친구들의 연필 소리를 들으며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던 중 교수님이 내 쪽으로 걸어오셨고 순간 불안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교수님은 아무 말 없이 내가 쓴 글을 읽기 시작하셨다. 그러더니 고요하고 적막한 연필 소리를 깨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쓰면 A"


그 순간 모두가 나를 쳐다보았다.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전개에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렇게 시험이 끝났다. 쉬는 시간에 교수님께서 내게 오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학생이 무용을 얼마나 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학생은 공부에 재능이 있는 친구니 최종적 꿈이 어떠하든 공부를 놓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말씀을 하시며 다시 수업을 시작하셨다. 무용과는 공부를 못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는 동시에 나에게 또 다른 재능과 능력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고 누군가 나의 재능과 능력을 알아봐 준다는 건 감동이고 감사한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 성적을 산출하는 기간이 되었고 그러던 어느 날 지하철을 타고 친구를 만나러 가는 도중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지하철 안이라 시끄럽기도 하고 모르는 번호라 받지 말까 고민을 하다가 받게 되었는데 시민교육 교수님이셨다. 놀랐지만 차분한 척을 하며 전화를 이어나갔다. 교수님께서는 왜 내가 이번 시민교육을 A+를 받아야 하는지 설득해 보라고 하셨다. 뭐라고 말씀드렸는지는 잘 기억은 안 나지만 교수님께선 잘 들었다고 말씀하시며 전화를 끊으셨다. 그렇게 성적 나오는 날이 되었고 교수님께선 A+를 주셨다. 


나에게 이 수업은 대학에 와서 가장 큰 의미가 있었던 수업이다. 성적을 잘 받아서 의미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생각과 내려갈 대로 내려간 자존감에 마치 한 줄기 동아줄 같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대학이 아니었고 실망감과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혀 방황하던 중 교수님을 만나 새로운 나의 능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난 이 수업을 통해 '나'라는 사람은 점수를 잘 받는 그런 공부가 아닌 느리지만 진정한 배움, 내 삶에 녹여낼 수 있는 배움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학생에게서 선생님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학생에게 선생님의 한 마디는 그 학생의 삶에 새로운 힘과 에너지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시간이 지나 첫 독립출판 본을 교수님께 보내 드렸다.

책을 보내드린 이유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내가 진심으로 그때의 일을 감사해하고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어서이다.  


교수님은 책을 다 읽으시고 이메일을 주셨다.

(이메일 내용 일부 중)


이게 바로 나라는 hj 학생의 외침 같기도 하고, 

나 여기에 있다는 청춘의 절규 같기도 하여 단숨에 읽었습니다. 


hj 학생 인생의 전성기(Salad Days)를 본 것 같아 기뻤습니다. 

서른 살의 hj 학생, this is me 2가 기대되는 글이었고요.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사페레 아우데(Sapere aude!)"라는 칸트의 외침을 기억하시지요? 

감히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 내가 누구인지,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여정이 어쩌면 인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풋내기 같은 성숙하지 못한 시절이 내 인생의 화양연화(花樣年華)였다는 사실을 나이 들어 알아가고 있기에 hj 학생의 글에 더욱 푹 빠졌는지도 모르고요.


hj 학생을 위한 화살기도 잊지 않겠습니다. 


이런 교수님을 만난 것 자체가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드는 내용들이었다.

내가 누군가를 가르치는 사람이 된다면 이런 영향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해 주신 교수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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