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시선으로부터의 자유
학원은 오전 일찍부터 시작해 오후 3시쯤 끝났다. 아침잠이 없는 나는 새벽에 운동을 갔다가 한 30~40분쯤 일찍 학원 앞 작은 공원 벤치에 스타벅스 커피를 들고 앉아 있는 것을 굉장히 즐겼다. 8시 20분쯤 도착하면 해가 건물 사이로 이 작은 공원을 비추었고 월가에 있다 보니 정말 많은 뉴요커들이 회사를 가는 것을 구경할 수 있는 딱 좋은 자리였다. 이상하게 정말 하는 것 없이 앉아만 있는데 이 시간이 그렇게 흥미롭고 편안할 수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이렇게나 재미있다니! 겨울이 오기 전까진 일주일에 한 3~4번은 이 벤치에 앉아 한국에 있는 친구와 영상통화도 하면서 사람 구경을 했다. 뉴욕 생활이 끝날 무렵 이 시간이 별생각 없이 앉아 있던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문화를 흡수할 수 있는 시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살다가 이렇게나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느낄 기회였다. 이게 기회라는 단어를 쓸 만큼 큰일이냐고 물을 수 있다. 그렇다. 아주 좋은 큰 기회이다. 여유롭게 아무 구애받지 않고 그 나라의 문화를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다양한 사람들을 보며 나는 한국의 외모지상주의에 아주 깊이 빠져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나 다양한 인종과 모습들이 있는데 한국은 특히나 다들 똑같은 미의 기준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기준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작아진다. 이런 외모지상주의에서 자란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매우 민감한 사람이었다. 가뜩이나 한국 자체도 외모지상주의인데 무용과라니 엎친 데 덮친 격인 셈이다. 무용과가 원하는 기준의 외모가 되기 위해 많이 노력했던 나는 언젠가부터 내가 왜 이래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나는 나인데 내가 나에게 만족하면 되는 것을 왜 자꾸 남들이 뭐라 하는지 말이다. 벤치에 앉아 사람 구경을 하면서 문득 생각이 들었다. “뭐야 나 완전 정상이네!” 그렇다. 나는 평범하면서도 정상적인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다. 한국에서 원하는 미의 기준에 안 맞는다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한국에선 비정상에 속하는 사람이었는데 나와 보니 지극히 정상인 것이다.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 속에 있으니 내가 어떻게 생긴 것이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님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정상의 기준이 있나 싶다. 나이기에 완벽한 존재인데 말이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로워진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고 얼마나 쓸데없는 것에 많은 에너지를 소비했는지 알게 되었다. 이걸 어떻게 글로 표현하면 좋을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마치 수영장 물속에 빠져 물에 젖은 옷 때문에 축축 처지고 원래 몸의 무게의 2배가 된 것 같은 느낌에서 보송보송하게 건조가 아주 잘 된 옷을 입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그만큼의 에너지 차이가 난다고 설명하면 조금 와닿을 것 같다. 그 정도로 많은 에너지를 정말 쓸데없는 남의 시선 신경 쓰는 데에 썼으니 얼마나 피곤했을지 과거의 나는 얼마나 무거운 무게를 지고 다닌 건지 이제는 상상이 가지 않는다.
단지 학원 앞 벤치 앉아 사람 구경한 게 전부인데 시선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것이다. 과연 이것이 내가 한국에 있었다면 가능한 일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난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공감각적 경험은 그 어떤 것보다 다도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이 나의 근거 없는 이론이다. 그들을 통해 나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인지하게 되었고 지금은 정말 그전과는 다른 가벼움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