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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니엘 Jul 17. 2023

비가 와서 기분이 안 좋아

문과, 이과 놀이

고교생이었던 나는 꽤 냉철하고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듣다가도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판단, 분석을 통해 해결책을 제시하고 결과를 투척하기에 열을 올렸다. 왜 그랬을까. 뒤늦게 아차 싶었다. 나에게 이런저런 고민도, 학교 이야기도 털어놓던 친구는 무슨 법정에 서서 판결을 기다리는 피고인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점점 속 깊은 이야기를 뒤로한 채 가벼운 일상 이야기나 하는 사이가 되었다.


물론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찐 친구들 중 한 명이지만. 그땐 친구로서 어려운 문제를 풀어서 답을 내줘야지만 진정한 친구의 임무를 다 하는 거란 대단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같이 웃어주고 같이 울어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내가 더 마음을 휘적거린 것 같아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든다.(웃음) 머 생사화복의 큰 문제를 거론하진 않았으니까.


좋아하는 과목도 과학, 수학 같이 답이 똭 정확하게 나오는 게 좋았다.(국어는 늘 좋았고. 흐흐) 그렇다고 성적이 매우 뛰어났다는  아니고 좀 더 재미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고2 때 이과를 선택했다. 사실 영어 문법 외우는 게 싫고 어려워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사회는 선생님이 설명 대신에 책에 밑줄만 그으라고 하시며 그냥 외우라고 해서 시험을 못 봤다고 핑계를 대면서. 그냥 맹목적으로 외우는걸 무지 싫어하고 못했던 거 같다. 어쩔 수 없이 문과, 이과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서는 답을 찾지 못했다. 너무 어려웠지만, 좀 더 마음이 기우는 쪽으로 했다.






근데, 참 이상하기도 하다. 비가 오는 날은 왠지 기분이 안 좋았다. 몸도 축 늘어지고 우울했다. 대부분 비가 오면 분위기도 가라앉고 기분도 센치해지는 경향이 있지만, 비 오는 날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무슨 기분 안 좋은 일 있냐고 하나, 둘 물어왔다. 아무 일도 없는데, 기분 나쁜 일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던 어느 날, 교실에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유 없이 눈물이 났다. 그러고는 놀란 짝꿍에게 비가 와서 그런 것 같다며 무안해서 비가 오면 기분이 안 좋다는 둥, 우울해진다는 둥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 이후로 친구들은 비 오는 날만 되면 "ㅇㅇ이 오늘 기분 안 좋아, 안 좋은 날이야"라며 약간 놀리는 듯 웃곤 했다.

그동안 나름 논리적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이런 비논리적인 감수성을 발견하고 처음으로 적잖이 어리둥절했다.

내가 이토록 감성적인 인간인가!





 

지금도 고등학교 때 만난 찐친들과 여행을 가는데 그 시절로 돌아가 문과 이과 놀이를 한다.

예를 들면, 글램핑 장에서 서로 엉켜있는 알전구를 잘 풀면 "이과라 그래" , 다 엉뚱한 소리 하고 있는데 한 친구가 잘 알아듣고 대답을 하면 "오~문과라 그래".

친구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문과라 그래, 이과라 그래" 하며 깔깔거리고 배꼽을 잡는 것이다. 급기야 '문과 이과 놀이'라는 명칭을 붙이고야 말았다.

이젠 만나기만 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놀이를 시작한다. 문과 2명, 이과 2명, 예체능 1명(미술전공한 친구)이 서로 손바닥을 맞추며 잘도 논다. 어떻게 보면 유치하기 그지없는데 왜 그렇게 웃긴지 모르겠다. 여학생들은 나뭇잎 굴러가는 것만 봐도 까르르 웃는 다더니 정말 마음은 그때의 여고생들이다. 이 친구들 아니면 머가 웃기냐고 할 수도 있다. 그만큼 죽이 착착 맞는 거 같다.

한 친구가 힘들었던 속 이야기를 꺼내는데, 듣고 있던 내가 먼저 울고 이야기한 친구가 울고 점점 울음바다가 됐다.

그 새를 놓칠 리 없는 이과 친구가 "아무리 봐도 ㅇㅇ이 문관데." 하며 나에게 딴지를 건다. "그러니까. 나 문과 갔어야 되는데, 이과로 잘못 갔나 봐" 울다가 웃는다. 

내가 써 놓은 글에는 울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그만큼 한마디로 내가 울보이긴 하다.


그렇다. ISTJ도 나오고 ISFJ(MBTI 성격유형)도 나오는 나는 이성적(T)일까, 감성적(F)일까.

잘 운다고 해서 감성적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고 이성적이라고 해서 공감을 못하는 게 아니듯이 어느 한 부분의 특징을 가지고 한 사람의 전체를 판단할 수는 없다. 이성적인 사람은 이과를 가야 하고 감성적인 사람은 문과를 가야 하는 것도 분명 억측이다. 하지만 성격유형을 나누어서 보면 같은 유형끼리는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지금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지만, 분명한 건 기쁠 때 같이 웃고, 슬플 때 같이 울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제목사진-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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