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와 당신들도
나의 인간관계는 참으로 빈약하다. 사람들에게 원체 적극적인 성격도 아닌 데다 조금은 무심한 면도 있어 어릴 적 함께 놀던 친구들이 서운해하곤 했다. 나이가 들고 나서는 각자의 삶을 건축하느라, 그들과 나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런 와중에도 새로운 인연은 생기고, 또 잊고 지내던 누군가의 소식을 전해 듣거나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누군가를 떠올리는 날도 있다. 손뼉이 맞부딪쳐야 소리가 나듯, 인간 관계도 그렇다. 한쪽의 노력으로는 유지될 수 없다. 예전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 나는 노력을 하지 않는 쪽이었고 어쩌면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려 애를 썼던 건지도 모른다. 한쪽이 포기하면 언제든 종결될 수 있는, 가느다랗고 부질없는 인연을 놓지 않아 준 것은 현재 나의 곁에 있는 그들이다. 다정한 인내에 경애를 표한다. 이제는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할 차례. 상대방이 먼저 깨닫고 눈치를 채주길 바라는 마음이 얼마나 이기적인 것인지 지금은 안다. 감정에게 자유를 줄 것. 나의 마음이 주체를 찾아 안전하게 당도할 수 있도록 할 것. 현재 진행 중이다.
6월 중순, 베리 자매를 만나러 인천에 갔다. KTX를 타고 광명역에 도착한 우리는 계획대로 인천 문학 경기장으로 향했다. 그날은 롯데와 SSG의 경기가 있는 날이었고, 운전은 내 동생 철이 했다. 철이 부산에 왔던 작년, 그날 이후 큐피드 삼월의 노력으로 내 동생 철과 베리의 동생 미미가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고 벌써 일 년이란다. 나는 아직도 이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우스갯소리로 베리와 나는 서로 사돈이 되는 거냐고 농을 하긴 하지만, 실로 사람 일이란 게 어찌 될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으므로 섣부른 기대나 걱정은 하지 않으려 한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차치하고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치열한 티켓팅에 성공해 표를 구한 삼월 덕분에 나와 삼월, 철, 베리, 미미 이렇게 다섯 사람이 원정석에 나란히 착석하게 되었다. (*참고로 베리와 미미, 철은 SSG을 응원했다.) 롯데 팬들의 열띤 응원과 수월하게 흘러가는 경기, 틈틈이 마시는 맥주, 시원한 바람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것 없이 만족스러웠다. 후반부 롯데의 기세가 꺾이며 역전패를 당한 것을 제외하고는. 우리 쪽 관중석에 있던 롯데 팬들 사이에서 탄식이 끊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삼월이 이마를 부여잡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전파를 타고 집에서 티브이를 보고 있던 그녀와 나의 가족들에게까지 전해졌다는 사실은 후문으로 전해 들었다. 패배의 아쉬움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채 도착한 곳은 월미도. 밤늦은 시간이었는데도 바이킹이 바쁘게 기우뚱거렸고 곳곳에서 술에 취한 이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자매가 몇 번 와 봤다는 조개구이 집은 매캐한 연기와 북적거리는 인파로 정신이 없었다. 연탄 불에 녹진하게 녹아가는 치즈와 가리비를 집어 먹으며 무슨 대화를 나누었던가. 아직까지도 여자친구 앞에서 양껏 먹지 못한다는 철이 뒤늦게 식사를 하던 장면 말고는, 자세한 기억이 나질 않는다.
자매들의 아파트에 들어서서는 새벽 늦은 시간까지 대화를 나누다 잤다. 미미는 일과 학업을 병행하고 있어 철과 함께 일찍이 방으로 사라졌고, 베리는 꾸준히 참여하는 독서 모임에서 서평을 그러모아 책을 펴냈다며 근사한 사인과 메시지가 적힌 책을 내게 주었다. ‘혼자서는 안 읽었을 책들’. 고전문학 서평을 엮었다는 내용을 알고 바라보면 상당히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책 제목이다. 같은 책을 읽어도 살아온 배경과 환경, 그리고 가치관에 따라 감상은 다르게 나타난다. 그녀의 독서 모임 멤버들은 나와 그녀보다 더 많은 시간을 살아낸 분들이라고 하니 베리는 그 과정에서 그들이 가진 통찰력과 지혜를 흡수하며 한 뼘 더 성장했을 것이다. 제 몫을 톡톡히 하는 사람이기에 그녀가 그곳에서도 상냥한 막내로서 예쁨을 받았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책은 아직 펼쳐보지 않았다. (미안하다.) 베리네 식구들과는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씩은 꾸준히 얼굴을 보려 하는 편인데, 만날 때마다 어떤 결과물이나 새로운 소식을 들고 오니 그들과의 만남이 기다려질 수밖에 없다. 그 집의 여자들은 끊임없이 도전한다. 부지런히 스스로를 개발하고 배우고 느낀다. 정녕 나와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 맞는지, 새삼 존경스러울 때가 있다. 확실하지 않아도 시작하고 보는 것. 관대한 태도로 시행착오를 맞이하는 자세를 그녀들에게 배워야 할 것이다.
사실 조금 더 부지런히 일어나 의욕을 가진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진대, 어릴 적부터 잠이 많았던 나는 삶도 잠처럼 보내길 바라고 있나 보다. 일련의 변론을 해 보자면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내 인생이 순탄했다고는 할 수 없다. 시기와 질투에 그대로 노출된 적도 있고 그로 인해 자존감이며 자존심까지 가파른 절벽처럼 깎인 적도 있다. 매 순간 도래하던 갈등은 내게 너무 버거운 것들이었고, 무던히 버티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은 흘렀고, 모든 것은 방류되었다. 물론 그것이 지금의 나태함에 대한 핑계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평온한 일상을 얻었으니 새로운 자극제를 찾을 때가 되긴 했다. …… 인지한 것만으로도 한 걸음 나아갔다고 치자. 인생도 분기마다 제출하는 성과 보고서처럼 확실한 결괏값을 도출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내 인생은 회사처럼 누군가 할 일을 정해주지도, 영리한 기준치를 설정해 주지도 않는다. 오로지 나 홀로 경영을 해야 하는 1인 사업장 같은 것이다. 내 사업이 어떤 규모로 성장할지 정확한 지표 역시 존재치 않지만 이따금 쓰고, 읽고, 생각하다 보면 언젠가 안정기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말하고자 하는 바가 흐리고 정신의 흐름대로 적은 글이라 면구스럽지만, 이 세상에는 나를 포함해 스스로 도태되고 있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성장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위로한다. 당신도, 그리고 나도. 힘내자. 부유하다 보면 어울리는 정착지를 찾게 될 것이다.
*베리는 7월 초,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신나게 이국의 정취를 돌아보고 있을 그녀의 용기에 찬사를. 무사히 돌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