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뛰어보고 싶은 주로가 있다
최근 러닝이 핫한 스포츠로 부상하면서 함께 떠오르고 있는 게 있다. 바로 러닝과 여행을 결합한 '런트립'이 그것이다. 메이저 대회 참가권을 포함한 패키지를 비롯해 꼭 대회가 아니더라도 달리기에 좋은 장소들을 여행지에 포함시키는 상품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런트립'은 꼭 여행사를 통하지 않고도 갈 수 있다. 자체적으로 원하는 지역의 대회를 예약하고 그 대회를 중심으로 여행 동선을 짜면 된다. 내 경우엔 홍콩에서 참가했던 런디즈니 홍콩이나 락앤롤 마라톤을 겸해 다녀온 미국 라스베이거스 여행 등이 '런트립'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나름대로 국내외 여러 대회들에 나가 봤지만, 여전히 뛰어보고 싶은 주로는 많다. 특히 내 경우엔 기록보다는 재미에 포커스를 맞춘 '펀런' 대회가 더욱 관심사다.
먼저 매년 12월 미국 하와이에서 열리는 호놀룰루 마라톤이다. 국내에서도 배우 하정우나 일본의 전 피겨스케이팅선수인 아사다 마오 등이 완주해 인지도가 높은 대회다.
많고 많은 풀마라톤 대회 가운데 꼭 호놀룰루 마라톤을 꼽는 이유는 도착 규정이 널널하기 때문이다. 차로를 통제해야 하는 마라톤의 특성상 국내 메이저 대회들에서는 5시간 이상 완주 시간을 주기 어렵다. 동아마라톤, JTBC 마라톤은 특히 서울 시내에서 열리기에 더 그렇다.
호놀룰루 마라톤 대회는 정해진 시간이 없다. 이론적으로라면 오늘 출발해서 내일 들어와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실제 지난 2018년에는 88세의 러너가 18시간여에 걸쳐 호놀룰루 마라톤을 완주해낸 기록이 있다.
아직 풀마라톤을 뛰어 본 경험이 없는 내겐 마음 놓고 완주 기록을 받아볼 수 있는 호놀룰루 마라톤이 희망 대회일 수밖에 없다. 느림보 러너에게 시간 압박이 없다는 건 큰 메리트다.
사하라사막 마라톤 대회, 고비사막 마라톤 대회, 아타카마 마라톤 대회와 함께 세계 4대 극한 마라톤 대회에 속하는 남극 마라톤 역시 버킷리스트 가운데 하나다.
16km부터 160km까지 여러 코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 뛰게 되며, 남극 곳곳을 누비며 펭귄 서식지, 빙산, 화산, 연구기지 등을 볼 수 있다. 물론 영하의 날씨가 달리는 데 좋을 수는 없겠으나 극한 지역을 달리며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다는 바람은 늘 있다. 참고로 남극 마라톤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세계 4대 극한 마라톤 가운데 두 곳 이상에서 완주한 기록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미국 서부를 총단하는 4286km의 장거리 트레일인 PCT(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완주를 꿈꾼다. 여러명이 한 날 모여서 함께 출발하는 다른 대회들과 달리 PCT는 PCT 협회에 신청을 해서 승인을 받아야 한다. 퍼밋을 가지고 개별적으로 PCT 여정에 오르면 된다.
PCT를 알게 된 건 영화 '와일드'를 통해서다. 작가 셰릴 스트레이드가 실제로 PCT 도보 여행을 했던 기록을 책으로 썼는데 이를 원작으로 한다. 주인공은 엄마를 잃고 나서 PCT 여정에 오르는데, 이 과정에서 지난날의 상처를 되짚으며 스스로를 치유해나간다.
4000km가 넘는 여정은 '구도의 길'이라고까지 할만하다. 그 긴 여정의 끝에 무엇이 남을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그 길에서 무언가 얻어올 것은 확실하다. 때로는 길에서 자야 하고, 야생동물이나 누군가의 위협도 피하며 걸어야 하는 길. 극한일 거라는 확신이 들지만, 그래서 더 걷고 싶다고 하면 의아하게 느껴질까.
PCT의 완주율은 절반을 조금 웃돈다. 두 명 중 한 명은 포기하고 돌아간다는 것이다. 언젠간 성공한 그 절반에 내 이름이 오를 수 있길. 그래서 나만을 위해 제작된 묵직한 메달을 손에 쥐어보고 싶다. '와일드' 역시 좋은 작품이니 기회가 된다면 관람해 보시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