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0일 ~ 26일
소말릴란드의 소년 작가가 수줍은 듯, 그러나 자랑스럽게 자신의 책을 들어 보이며 미소 짓고 있다. 이 사진을 본 순간, 나는 2017년 경희대 범아프리카문화연구센터가 주최한 강연에서 뵈었던 소말리아 출신 작가 누르딘 파라(Nurudin Farah)를 떠올렸다. 아주 단순하지만 가장 큰 이유로 소말릴란드와 소말리아가 비슷한 이름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고, 또 하나 중요한 이유로 당시 강연에서 누르딘 파라가 사진 속 작가의 연령대였을 때 자신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줬기 때문이었다. 이 글을 통해 작가의 육성으로 들었던 그의 유년 시절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그전에 먼저 사진 속 16살 작가의 나라인 소말릴란드와 내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누르딘 파라의 나라 소말리아를 구분하고 본론에 들어가야 할 것 같다. 소말릴란드와 소말리아는 아프리카 동부에 뿔처럼 튀어나온 곳에 위치한 나라들로 각각 영국과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다가 1960년 6월 26일과 같은 해 7월 1일에 독립했다. 그러나 소말릴란드가 소말리아에 통합되면서 소말리는 분리운동을 펼쳤고 1991년에 독립을 선언했지만 국제사회의 승인을 받지 못한 미승인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두 나라는 인접한 국경과 비슷한 국명 때문에, 그리고 소말리어와 이슬람교 등 언어와 종교를 공유해서 자칫 같은 나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다.
이제 누르딘 파라에 대해 이야기하자. 사실 한국인에게 누르딘 파라는 생소한 제3세계 작가 정도로 여겨질지 모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소개된 소설이 <지도(Maps)> 단 한 권일 정도로 한국인 독자들이 그를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매년 노벨상 수상 후보로 거론되는 세계적 작가이다.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 문학 연구자들의 초청으로 2011년 처음 내한한 누르딘 파라는 작년 2017년과 올해에도 한국을 찾을 만큼 한국과의 인연을 짙게 만들어가고 있다.
2017년 방한했을 때 누르딘 파라는 ‘나의 인생을 만든 갈등들’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유년시절에 시작되어 끝끝내 화해하지 못한 아버지와의 갈등, 구비 시인으로 작가에게 작가 유전자를 물려준 어머니에 대한 사랑, 전쟁으로 인해 매일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몸으로 느끼는 소말리아 사람들의 고통, 작가에게 집이 되어준 글쓰기에 대한 고마움과 작가로서 세상에 기여해야 한다는 의무감 등에 이야기했다. 그는 아버지가 통역관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주민들과 상의하지도 않고 소말리아의 오가덴 지역을 에티오피아에 넘겨버렸다는 엄청난 사실을 고백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 간에 전쟁이 일어났고 2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것을 알면 이 고백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인생이 ‘많은 면에서 비정상적으로, 매일 상처를 안고, 간신히, 그리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사람의 인생과 많이 닮아 있다’고 말하는 작가의 음성은 무척이나 차분하고 덤덤했다. 가장 비열한 방식으로 소말리아를 대하는 에티오피아 정부 때문에 오가덴의 소말리아 사람들이 학교, 병원, 전기, 포장도로 등 당연히 제공받아야 할 것들을 제공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누르딘 파라는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오가덴에서 태어난 사람들의 삶은 엄청난 독성을 지닐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많은 아픈 이야기들 중에서도 작가의 비범함을 증명하는 반짝이는 이야기 하나가 내 가슴에 남아 나를 미소 짓게 한다. 내가 가장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그 이야기이다.
작가는 ‘소신 있게 나의 길을 걸어가고 독립적인 생활을 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실천하고자 어릴 적부터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주는 일 등을 하며 돈을 벌고 있었다. 어느 날, 그에게 한 남자가 찾아온다. 가출한 아내에게 돌아오라는 편지를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여자는 남편의 폭행에 못 이겨 도망쳤고, 이제 정말 괜찮은 다른 남자를 만나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작가는 남자의 요청을 수락하지만, 정반대 내용의 편지를 여자에게 보낸다.
“당신이 좋은 남자를 만나 잘 살고 있다고 들었소. 행복하길 바라오.”
여자는 급변한 남자의 태도에 놀라지만 이내 안도하고 새로운 남자와 계속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남자는 편지를 보냈는데도 여자가 돌아오지 않자 작가에게 계속 편지를 보낼 것을 요청했다. 그때마다 작가는 요청을 수락만 하고 편지를 보내지 않았고, 지친 남자는 돌아오지 않는 여자를 포기했다고 한다. 소년 누르딘 파라는 필요한 돈도 벌고, 여자의 행복도 지켜준 것이다. 그렇다면 남자는 자신이 여자에게 했던 행동을 뉘우쳤을까?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
앞으로 닥칠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편지에 적힌 내용을 남자가 알기라도 한다면. 성난 남자가 어린 누르딘 파라에게 해코지라도 한다면. 여자에게 찾아가 난동을 부리기라도 한다면. 아무 일 없이 무마된 것이 오히려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며 하늘이 작가와 여자를 도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일을 계기로 누르딘 파라는 자신의 행위에 자신감을 얻고 ‘누군가의 삶을 조금이나마 낫게 하기 위해 작으나마 선한 일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글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누르딘 파라에 대한 반짝이는 기억을 일깨워준 사진 속 소말릴란드 소년 작가의 이름을 함께 찍힌 책에 적힌 제목(Ab-Ka Halee, 우리 조상들의 발자취 속에서)을 인터넷 검색해서 찾아냈다. 압디샤쿠르 모하메드(Abdishakur Mohamed). 그는 소말릴란드의 문화를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친구들에게 반박하기 위해 이 예사롭지 않은 제목의 책을 썼다고 한다. 그런 친구들이 많아질수록 소말릴란드의 정체성이 위험에 처할 거란 위기의식과 함께 말이다. 16세의 이 대단한 소말릴란드 작가가 조국이 국제사회의 인정도 받지 못한 설움 속에서도 자부심과 정체성을 잃지 않고, 누르딘 파라처럼 ‘누군가의 삶을 조금이라도 낫게’ 해 줄 마음으로 글을 쓰는 작가로 성장하기를 기원한다. 그래서 언젠가, 그에 대해 긴 글을 쓰게 될 날이 오기를 바란다.
* 작은따옴표(‘ ’)의 문장들은 누르딘 파라의 경희대 강연 주최 측이 제공한 유인물에서 인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