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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프로 마치 Jan 15. 2019

15. 독일이 나미비아에 저지른 비극

2018년 8월 24일 ~ 30일

Reuters / 100년 전, 반식민 봉기를 일으킨 헤레로족과 나마족 수만 명이 살해되었다. 이들은 독일의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아프리카마치의 단상-



나미비아, 아프리카를 공부한 나로서도 그다지 눈길을 주지 않았고, 이름이 자주 회자되지도 않는 나라이다. 지도를 보니 나미비아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유명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북쪽, 아프리카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잘 정착된 보츠와나의 서쪽, 요즘 대통령 선거로 말썽이 많았던 짐바브웨의 남서쪽, 그리고 내 논문의 배경이 된 국가인 앙골라의 남쪽에 위치해 있다. 비교적 유명한 나라들에 둘러싸인 유명하지 않은 나라라는 것을 알겠다.


별로 좋은 구분은 아니지만 아프리카 대부분의 국가들은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의 식민지배를 받았는데, 나미비아는 독일의 지배를 받은 몇 안 되는 아프리카 국가이다. (영국 지배를 받은 탄자니아, 프랑스 지배를 받은 카메룬도 한때 독일의 지배를 받았다.) 안타깝게도 나미비아는 독일 지배에서 벗어난 뒤에도 1990년까지 같은 아프리카 국가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지배를 받았다.


나미비아를 식민지로 삼았던 독일은 히틀러가 저질렀던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철저한 사죄와 배상으로 세계의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나라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고문과 학살, 종군위안부, 민간인 생체 실험 등 수많은 만행을 저지르고도 1965년 한일협정으로 한국에 차관을 제공했으니 할 만큼 했고 더 이상 사과는 없다며 고자세를 보이는 일본에게 독일을 배우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독일에 대해 아는 사실은 반은 맞고 반은 맞지 않다. 우리는 유대인 학살에 대해 통렬히 사죄하고 배상했던 독일의 모습만 보고, 나미비아의 헤레로족과 나마족의 무참한 학살에 대해서는 오랜 시간 동안 눈길조차 주지 않으려 했던 독일의 모습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독일의 나미비아 대학살은 1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4년부터 나미비아를 통치했던 독일 그 땅의 주인들에게 땅과 가축을 빼앗아 소작농으로 부리며 인간 이하의 대접을 한다. 독일의 수탈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헤레로족과 나마족이 1904년에 결국 봉기하자, 독일 식민정부는 자신의 영토에 있는 모든 헤레로족과 나마족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 결과 1904년부터 1908년까지 헤레로족의 75퍼센트, 나마족의 절반이 살해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어 생체실험 재료로 사용되었다.


그런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고도 독일은 자기 민족의 우수성을 입증하겠다며 학살된 나미비아인 들의 뇌를 독일로 갖고 가는 오만하고도 기괴한 행동을 한다. (그런 식으로 독일은 카메룬, 토고, 르완다 사람들의 뇌도 가져갔다.) 독일은 나미비아 식민통치에 대해서는 사죄했으나 대학살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태도를 보였었다. 그러나 2011년에 나미비아인 20명의 유골을 반환했고, 2015년에 비로소 대학살에 대해 사죄했지만 배상 문제에는 난항을 거듭했다. 독일 정부의 유대인 피해자와 나미비아 피해자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던 것이다.

 

그리고 2018년, 독일은 또다시 유골을 반환했고, 배상을 위한 협상을 진지하게 진행 중이라고 한다. 유대인 학살에 대한 사죄와 배상에 비하면 한참 늦었지만, 그래도 잘못을 인정하고 행동으로 용서를 구하려고 하니 다행이다 싶다. 그런다고 비명에 간 나미비아인, 죽어서도 독일에 끌려가야 했던 나미비아인들의 한이 완전히 풀리기는 힘들겠지만,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의 넋이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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