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선택이 달랐더라면 내 인생도 달라졌을 텐데, 하며 후회하는 일들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내게는 중학교 1학년, 열세 살 때 그런 순간이 처음으로 찾아왔었다.
1987년, 당시 미국에 사는 둘째 고모 부부는 우리 집안의 자랑이었다. 그들이 미국에서 어떻게 사는지는 차치하고, 미국에 가족이나 친척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자랑거리가 될 수 있는 시절이었으니까. 그런 미국 고모 부부에게는 아기가 없었다.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가서 어떻게든 그곳에 정착하려고 했던 부부는 미국 이민법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리고 만 열서너 살 미만의 아이가 슬하에 있으면 이민이 수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둘째 고모는 결혼 전에 아기였던 나를 끼고 살았었다. 살아가는 일에 치여 막내인 나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엄마보다는, 젊고 예쁘고 늘 나와 함께 해주는 고모가 나도 더 좋았다. 심지어 진짜 내 엄마였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었던 것 같다. 1979년, 고모가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그 말 많던 다섯 살짜리 아이가 한없이 조용해졌고, 결혼식 날에는 볼살이 쏙 빠져서 얼굴이 퀭했다고 한다. 그런데 8년 뒤, 그 고모가 내 엄마가 될 기회가 찾아왔다.
중학교에 입학하여 첫 학기를 보내고 있을 때, 고모가 한국으로 들어왔다. 고모 없이도 훌쩍 잘 커버린 나였지만, 고모가 온다는 소식에 기세가 더 등등해졌다. 밤이면 여섯 식구가 바둑판무늬의 커다란 이불을 덮고 앉거나 드러누워 TV를 보곤 했는데, 거기에 고모도 끼게 되었다. 어느 날 밤, 고모는 아빠와 엄마에게 만 열세 살인가 열네 살, 그러니까 우리 나이로 열네 살 혹은 열다섯 살 미만의 아이가 있으면 미국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했다.
나보다 어린 사촌들이 여럿 있었지만, 고모는 미국 이민법이 제시하는 기준에 아슬아슬하게 부합하는 나를 입양 대상으로 선택했다. 타지에서 남편만 바라보며 살던 고모에게 나는 한없는 그리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옛날만큼 애절하진 않아도 나 역시 고모를 무척이나 그리워했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엄마가 되어주고 딸이 되어주는 이 엄청난 사건이 그리움만으로 일어날 수는 없다. 고모에게는 뿌리내리기 힘든 미국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싶은 간절함이, 나에게는 그토록 하고 싶었던 미국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설렘과 기대가 있었다.
딸만 넷인 집안에서 막내딸 하나 다른 집에 보낸다고 크게 마음 아프거나 아쉬울 리 없었다. 나는 벌써 ‘미국인’이 되어 있었다. 학교에서는 여름방학에 미국에 갈 거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얼마나 잘난 척을 했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한여름 밤, 마룻바닥에 대자로 누워서 예쁘고 잘 생긴 미국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 영어를 쏼라쏼라 구사하며 활개 치는 모습을 상상하면 무더위도 한결 시원해졌다. 간혹 뉴스에서 주워들은 흑인 폭동 때문에 골목 모퉁이에서 흑인 갱스터들과 맞닥뜨리는 장면이 떠올라 겁이 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미국에 가고 싶은 마음, 꼭 가겠다는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솜사탕처럼 달콤했던 구름 위에서 툭 떨어지는 것은 찰나였다. “너는 엄마 생각은 안 하니?” 나보다 다섯 살 많은 셋째 언니가 호되게 나를 나무랐다. 그날, 나는 식구들에게 미국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 후로 아무도 미국 얘기를 하지 않았고, 우리에게 미국 얘기는 한 번도 있었던 적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한동안 한국에 머물렀던 고모마저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고 묻지 않은 채 미국으로 돌아가셨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가니 아이들은 “미국 간다더니 왜 왔어?”라고 물었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져 버린 이 한 편의 에피소드는 가끔 복잡한 심경으로 나 혼자 되씹는 일이 되었다. 미국에 가지 않겠다는 결정이 온전히 엄마를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삶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마다 나는 열세 살, 여름방학에 내린 이 결정을 생각한다. 언니는 왜 내게 그런 말을 해서 나의 미국행을 막은 것일까,라는 원망. 미국을 갔더라면 나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 있을 텐데,라는 후회. 아니, 그렇게 쉽게 포기했던 것은 나도 낯선 곳에 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을 거라는 자조. 설사 미국에 갔더라도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한국에서보다 더 못한 상태로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체념. 그러나 결국엔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영어 하나는 잘하게 됐을 텐데.”
사실 이후로도 내겐 미국에서 살 기회가 몇 번 더 있었다. 원했던 만큼의 대학 입시 결과를 내지 못하고 방황했을 때, 대학 졸업 후에도 변변한 직장을 잡지 못해서 또 방황했을 때. 그때마다 고모는 미국에서 내 자리를 마련해 주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나는 그 제안들 역시 거절했다. 대학 입시 후에는 무력감이 새로운 시도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대학 졸업 후 하릴없이 미국에 갔을 때에는 그 넓은 미국이 한국보다 더 답답하기만 했다.
숱한 세월을 지나오면서, 그만큼 여러 일들을 겪어오면서, 그때 선택을 달리 했다면 내 인생도 달라졌을 거라며 후회하는 일은 많이 줄어들었다. 돌아가기에 너무 먼 길을 와버렸기 때문에? 놀랍게도 당시에는 후회스러웠던 선택이 지나고 보면 모두가 의미 있는 결정, 인생이라는 커다란 퍼즐을 맞추기 위해 꼭 필요한 한 조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이후 긴 시간을 살아온 지금에서야, 나는 ‘미국행 초대장’을 돌려보낸 결정에 한국에서의 삶과 사람들에 대한 애정, 혹은 미련이 크게 작용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엄마 배를 선택하고 이 나라에서 태어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미국행 초대장’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선택한 이 삶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등장한 하나의 ‘상징’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