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가 번역 일을 하시는 게 힘들어 보이기도 했지만 책 읽고 음악 듣고 영화를 보는 등 문화생활을 즐기며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도 많이 하면서 열심히 일을 하시는 모습이 멋져 보였다. 나도 이모처럼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나를 위한 인생을 살아가고 싶다.
큰언니는 대청소를 하다 발견한 거라며 조카 이현이가 중학교 3학년이었을 때 과제로 작성한 “역할모델 인터뷰하기”를 내게 건넸다. 빠른 1996년생인 조카가 15살이었으면 2010년, 내가 36살이었을 때였다. 나는 조카와 이런 인터뷰를 했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그런 적이 있었나 싶게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테다. 인터뷰 사진에서는 책과 LP, CD, DVD 등이 두 겹으로 빽빽하게 꽂힌 내 방 책장을 배경으로 나와 이현이가 앉아 있다. 인터뷰어 역할을 맡은 조카는 반듯한 자세로 조금은 경직된 미소를 짓고 있는 반면, 인터뷰이 역할을 맡은 나는 조카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인 채 꽤나 여유롭고 자애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미소를 짓고 있다. 둘 다 시원하게 반팔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여름이었나 보다.
인터뷰는 총 15개의 질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미리 준비한 것처럼 보이는 질문도 있지만, 인터뷰 내용에 따라 즉석에서 내놓은 것 같은 질문들이 더 많아 보인다. 조카는 지금 업계 관계자들이 눈독 들이는 커리어우먼으로 성장하여 멋지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그때는 과제 마지막장에 적은 것처럼 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나 보다. 인터뷰 질문을 보면 그 꿈이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을 만큼 예리한 질문들이었다. 그런 자랑스러운 내 조카가 역할모델로 선택한 나, 조카의 프리즘을 통해 묘사된 십수 년 전의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는 열린 사고를 갖고서 편견 없이 사는 것을 가치관으로 삼은 사람이었다. 바라던 결과를 얻지 못한 ‘추운 시기’에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인내를 지닌 사람이었다. 가끔 생각하지도 못한 사람에게서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사람보다는 책의 구절들에서 인생의 지침을 받는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지식과 감성의 전달자로서 번역가의 역할을 자랑스러워했기에 부당한 대우를 이겨내려 했고, 번역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조금 힘들다고 포기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주도대로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하는 자신감 있는 사람이었고, 더 자유로워지고 싶은 꿈을 지닌 사람이었다. 조카에게는 살면서 일어나는 힘겨운 일들 속에서도 의미와 가치를 찾고 내면에 귀 기울이면 너 자신으로 살 수 있게 될 거라고 조언해 주는 이모였다.
나, 이런 사람이었어?
조카가 아니라 내가 역할모델로 삼고 싶은 사람이 여기 있었다. 나는 속에 없는 말은 못 하는 사람이다. 상대를 기분 좋게 해주는 말도 결코 빈말로 하지 못한다. 따라서 조카의 역할모델로서 인터뷰한 내용 역시 내가 나의 인생을 살면서 사유하고 성찰한 것, 즉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일 게 분명했다. 2010년의 나는 2024년 나의 역할모델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과 자질을 갖춘 사람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 인터뷰의 기저를 흐르는 감성은 내가 기억하는 ‘2010년 송정은’의 감성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현자의 것처럼 강인하면서도 초연하다. 기억 속의 그 사람은 늘 걱정거리를 달고 살았고 그만큼 불안에 떨었으며 제대로 된 갈피를 잡지 못해 방황했는데! 지난날들을 전생이나 꿈인 듯, 저 세상 일처럼 느끼는 별난 인식 체계를 가진 내게 일기장은 정말 소중한 ‘학술 자료’이다. 혹 급사라도 하게 되면 남은 가족들이 유품을 정리하다 읽게 될 것이 두려워서 태워야 하나 고민했던 일기장. 나는 나를 ‘연구’하고 싶어졌다.
내 손바닥보다 조금 큰 노란색 스프링 무선노트인 2010년 일기장을 펼친다. 시로 빽빽하다. 세상으로 나오지 못한 목소리들의 무덤 같다. 블록처럼 촘촘하게 쌓인 시들은 작자를 적지 않아 내 것인지 남의 것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시 제목이나 한 구절을 검색해서 기존 시인의 것임을 알아낸다. 줄을 그었거나 머뭇거린 흔적이 보이면, 풋내가 느껴진다면 그건 나의 시다. 격한 감정을 토로한 일기마저도 산문시 같다.
아, 그때 난 나와 함께 할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어쩌면 할 수 없는 한 남자와 이별 중이었다. 누가 나 모르게 내 이름으로 남긴 꽤 큰 빚을 갚기 위해 지인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녔고 학습지 교사도 하고 있었다. 6개월 일하는 동안 연체된 회비 납부를 재촉했다고, 자기가 생각했던 학습지와 다르다고 내 얼굴에 학습지를 던지는 학부모를 두 명이나 만났었다. 다행히, 이때만 해도 난 번역가로 순항하게 될 거라 기대할 수 있었다. 나아가 ‘번역가이면서 시인’이라는 나만의 직업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습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기장에는 뜬금없이 새로운 출발을 하겠다며 네덜란드 유학을 알아보는 장면도 눈에 띈다. 요가 강사가 될 생각으로 요가 학원에 다니며 공부한 흔적도 있다. 이런저런 요가 자세를 한 미라 같은 사람 옆에 자세한 설명이 적혀 있다.
조카 말 대로, 정말이지 난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며 자유롭게 사는 사람 같아 보인다. 정신없이 바쁘게만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움직임이 살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기댈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근데 그것은 나만 아는 게 아니었다. 뜻밖에도 조카는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혹시 자유롭게 보이기만 하는 거면 어떡하나 생각했는데 정말로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해서 다행이었다.” 세상에나! 부끄럽게도 그 어린것이 이모 속을 간파하고 있었다.
따로 한 편의 글로 풀어낼 풍파들이 그 후로도 찾아왔지만 2024년 오늘까지 난 살아남았다. 그리고 다시 교차점에 있다. 아니, 변곡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14년이나 지났는데도 2010년에 했던 비슷한 방황과 불안 속에 있는 현실이 못내 서글프다. 그러나 새롭게 풀어낼 또 다른 이야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벌써부터 눈에 보인다. 2010년에 생존했던 ‘조카의 역할모델’은 괜스레 나를 찾아온 게 아니었다. 그것은 내게 삶이라는 두터운 외피에 가려져 잊히기 쉬운 진정한 나, 꽤 괜찮은 나를 일깨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