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폼나게 글을 쓰고 싶었다. 내가 대학교를 졸업했던 1997년은 이렇게 컴퓨터 노트북이 상용화된 시기가 아니었기에, 그 시절 나의 상상 속 작가는 공책 한 권과 볼펜 하나를 가방에 넣고 발길 닿는 대로 길을 거닐다 마음에 드는 곳에 머물러 먼 산 바라보며 유유자적하게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십 대 초반의 나에게는 글로 풀어낼 만한 이야깃거리가 별로 없었다. 글을 쓰더라도 내 마음 같지 않은 세상을 원망하고 하소연만 토로하게 될 것 같았다. 작가의 꿈은 말 그대로 꿈일 뿐이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몽상가는 냉엄한 현실을 마주했고, 작가라는 단어를 뇌리에서 지웠다. 1998년 IMF가 맞물린 시기에, 운 좋게도 월급을 120만 원이나 주는 외국 회사의 비서가 되었다. 그러나 1년 2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답답’했기 때문이었다. 한 푼이 아쉬운 집안의 딸에게 오지 않았으면 좋을, 분에 넘치는 기나긴 방황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이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외국회사 이전에도 두어 곳의 회사를 더 다니면서 나는 내가 직장생활 즉, 상명하복의 조직생활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는, 자기 이해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세속의 삶을 사는 데는 그리 좋지 않았다. 나를 찾다가 자칫 세상살이에서 도태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20대 중반의 여성에게 시간은 무궁무진해 보였고, 어떤 어려움도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혼자 내 맘대로 있고 싶으니 글쓰기가 딱이었고, 내 이야기가 별로 없는 것 같으니 타인의 글을 옮기는 번역이 딱이었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신 안정효, 이윤기 님과 같이 소설가이면서 번역을 하는 ‘글쟁이’들이 내 롤모델이었다. 번역가로 성공하고 나면 언젠가 나도 저들처럼 내 글을 쓰게 되리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2000년 말에 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원’을 세웠고 2006년에 이른바 ‘등단’ 즉 출간 번역서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글쟁이를 꿈꾸던 몽상가가 맨땅에 헤딩하며 번역가가 되는 과정을 풀어내려고 한다.
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대학생일 때 다니던 어학원의 번역 준비반과, 신문 공고로 알게 된 방송국 아카데미, 그리고 대학교 사회교육원이 물망에 올랐다. 이들을 놓고 학습 기간과 비용, 미래 성공 가능성 등을 저울질하다가 어느 명문 대학교 사회교육원의 영상번역반에 등록을 했다. 당시 동행했던 친구는 번역보다 영어 교육자격증인 TESOL 취득반이 더 낫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내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보니 세상살이에 눈이 밝았던 친구의 조언을 따랐다면 인생이 훨씬 수월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여기 있지 않은 그 친구가 너무 그립다.
그런데 패기 만만하게 등록한 대학 사회교육원의 영상번역반이 정원 미달로 폐강되었다. 다시 번역 공부할 곳을 물색해야 했다. 2002년에야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던 유명 번역가가 차린 번역회사에서 번역학교를 운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머니 사정이 변변치 않았던 내게 수강비용이 감당할 만한 데다, 첫 번역서를 발간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점이 아주 매력적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번역 인증시험을 본 뒤 수강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수강생이 많았고, 직강을 했던 그 유명 번역가는 수강생들을 몇몇 씩 팀으로 짜서 공동 번역작업을 시작하게 했다.
나는 다섯 명으로 구성된 <신화창조>라는 팀에 들어갔다. 당시 출판계는 신화 열풍이었는데, 우리가 맡은 책은 아프리카 여러 ‘종족’들의 구전신화 모음집이었다. 아프리카 연구자가 된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리니 그 만남이 일종의 예언적 사건이 아니었나 하며 헛헛한 웃음을 짓게 된다. 팀장이었던 나는 번역 실력과 글솜씨가 천차만별인 다섯 사람의 번역문들을 적정한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다듬느라 매일 같이 씨름해야 했다. 내가 번역하는 시간보다 그들의 번역을 번역문처럼 고치는 시간이 더 길었다. 그 고생을 하는 와중에 한 팀원이 왜 자신이 팀장이 아니고 내가 팀장이냐고 따지는 바람에 잠시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다. 유명 번역가가 그녀에게 내가 팀장이어야 하는 이유를 단호하게 설명해서 금세 마음이 풀어졌지만.
2002년에 돌입한 공동번역은 2003년까지 1년간 지속됐고, 최종 번역물을 출판사에 제출했지만 결국 출간되지 못했다. 번역료 또한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신기하게도 나는 그 모든 어려움을 나를 단련하기 위해 필요한 과정으로 여기고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 같다. 때문에 출간이 안 된 것이 아쉽기는 해도 화가 나진 않았다. 심지어 나 스스로도 자신하지 못하는 번역물이 출간되지 않아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1년간 나의 모든 열정과 기운을 쏟아부은 것에 대해 단 한 푼의 금전적 보상도 받지 못한 것은 많이 속상했다. 게다가 번역회사가 타 업종에 손을 뻗으며 번역비를 유용한다는 소문이 있어서 돈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더 안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번역과 같이 이른바 고차원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 돈을 밝히면 안 된다는 이상한 마인드도 갖고 있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돈얘기를 해서 생기는 불편한 상황을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기에 스스로 만든 방어기제였던 것 같다. 그러나 지방에서 상경해서 번역을 공부하던 사람에게는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내 번역 인생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곧 자세히 언급될 H는 “우는 아기 젖 준다 “는 말을 믿으며 번역가 사장에게 매달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회사에 취직까지 하여 돈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었다. 나도 결국 그 회사에 취직했다.
이 유명 번역가는 자기 직원들에게도 월급을 주지 못하는 사장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머무는 (H 이외의) 사람들은 돈에 있어서 나보다 더 놀라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언젠가 사정이 나아지면 월급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며 사장을 믿고 있었다. 번역가 사장도 내게 “한 번 같은 배에 올라탔으면 끝까지 가보자”라고 했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나는 직장 생활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경제적 보상이 전무한 상황에서 번역이 아닌 복사 같은 잡무만 하다 보니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이 피폐해졌다. 회사를 나설 때, 사장은 내가 원치도 않은 분야인 자기 계발 번역 원서를 마치 퇴직금 주듯, 선심을 쓰듯 내게 건넸다.
2005년에 시작된 그 자기 계발서 번역은 2006년 9월,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내가 번역가로서 정식 ‘데뷔’를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 기다려왔던 그 순간에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내가 원했던 분야의 책이 아닌 데다 그 책을 번역하게 된 계기와 과정을 떠올리면 항상 우울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은인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앞서 언급한 H는 그 번역회사와 작별한 뒤 해외 도서 에이전시의 기획자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자기가 잘 아는 출판사 사장에게 말해서 내게 ‘외서 검토자’ 아르바이트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그 출판사를 통해 나는 그토록 하고 싶었던 소설을 번역했고 2007년, 출간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야 나도 나 자신을 ‘진짜’ 번역가로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H는 자기가 바닥을 칠 정도로 힘들었을 때 내가 30만 원인가 50만 원인가를 아무 말 없이 빌려준 것이 너무 고마웠다고 했다. 그녀는 나만 보면 “복 받으실 거예요.”라는 말을 주문처럼 읊었다. 그 후로도 몇 년 동안 그녀와의 인연은 지속되었고, 나의 번역가로서 커리어도 함께 보장되었다. 그러나 번역을 시작하면서부터 누적된 경제적 어려움과 정신적 피폐함에 맞물려 결정적 사건이 야기한 번역 세상에 대한 환멸로 인해, 나는 아무 미련 없이 번역에 작별을 고하게 된다. 무명 번역가로 살았지만 유명 번역가가 된 것 같은 찰나의 순간도 있었다. 고충이 많았지만 번역가라는 자부심으로 긴 시간을 버텼다. 그 모든 이야기를 다음 글 "무명번역가 2. 흥망성쇠기"에서 이어가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