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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프로마치 Oct 26. 2024

무명번역가 2. 흥망성쇠기


  나는 번역가로 2006년부터 2020년까지 14년을 살았다. 또 2006년부터 2012년까지 7년을 살았으며, 2007년부터 2012년까지 6년을 살았다. 




  도대체 무슨 계산법인지 의아하게 느껴질 것이다. 첫 번째 14년은, 내 이름으로 번역된 첫 책이 나온 시점부터 마지막 책이 나온 시점까지를 의미한다. 두 번째 7년은, 내 첫 책이 출간되어 번역가로 ‘데뷔’를 한 시점부터 내가 ‘번역가’라는 타이틀을 내려놓기로 마음먹은 시점까지를 의미한다. 마지막 6년은, 내가 원하는 분야의 번역물을 내기 시작하며 자신을 ‘번역가’로 자신 있게 소개하고 그 사실에 행복해했던 기간을 의미한다.


  또 다른 방식으로 나의 번역가 일대기를 요약해 보겠다. 나는 2000년에 번역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고, 2002년부터 번역 공부를 시작했으며, 2006년에 비로소 번역가로 데뷔를 했다. 2007년에 내가 정말 번역하고 싶었던 종류의 책을 출간했고, 2012년에는 번역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며, 2020년에야 번역과의 인연을 완전히 마무리지었다. 이 일대기에 따르면 나와 번역의 인연은 무려 20년에 달한다.




  이제 사람들은 나를 번역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한때 평생 번역가로 살고 싶어 했던 나였지만, 내가 번역가였다는 사실을 상기시기키는 말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번역에 대한 거부감이 깊었던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은 나의 20대부터 40대까지를 관통하는 키워드이다. 내가 30대 전반과 40대 일부의 시간을 번역가로 살았다는 사실도 부인할 순 없다. 그러므로 내 인생을 논하는 데 있어 번역과 번역가에 관한 이야기는 결코 빠질 수 없다.




  이제 글의 제목 “무명번역가 2. 흥망성쇠기”를 충실히 반영하는 글을 시작해야겠다. 먼저 간단 요약이다. 나는 2007년에 내가 원했던 종류의 책을 번역하여 출간했고, 이후로 매년 2,3권씩의 책을 번역, 출간하면서 2012년까지 번역가로서 나름 행복한 삶을 살았다. 그 사이에도 개인적으로 무수히 힘든 일을 겼었지만, “나는 번역가다”라는 사실은 나를 당당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2012년에 출간된 한 번역서는 나를 구름 위로 올려놓았다가 순식간에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버렸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나는 내 번역에 대한 칭찬을 공개적으로 들었다. 곧 유명번역가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오역을 지적하는 리뷰가 올라왔다. 처음 그 글을 접했을 때 내가 읽는 글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눈을 뗄 수 없었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리뷰가 도화선이 되어 비판 댓글이 줄줄이 이어졌다. 나와 다음 책 번역을 예약했던 출판사들로부터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는 매우 조심스럽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호기심이 발동하여 어떤 책인지 찾아보는 것은 상관없지만, 내가 내 입으로 그 책을 언급하고 싶진 않다. 다만, 이 이야기가 번역가들이 갖고 있는 심적 고충을 단번에 보여주는 명쾌한 사례로 역할을 할 수 있길 바란다. 번역가에게 치명타인 ‘오역 논란’을 겪고도 여전히 활동하는 번역가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건 내가 보기에, 유명 연예인이 회복 불가능해 보이는 스캔들을 이겨내고 연예계에 다시 등장하는 것과 비슷한 정도로 힘든 일이다. 나는 내 번역에 대한 부정적인 댓글들을 힘겹게 읽으며 연예인을 비롯한 유명인들의 녹록지 않은 삶을 간접 경험했었다.


  번역가로서 당당하고 행복했던 수년의 삶은 단 몇 줄로 마감되고, 번역에 진절머리를 내게 만든 그 한두 달의 이야기가 수 줄로 적히는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해 여전히 할 말이 많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나는 이 일을 계기로 힘겹게 얻은, 그리고 자랑스러워했던 ‘번역가’ 타이틀을 미련 없이 내려놓게 되었다. 그 일은, 내가 감히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을 오랫동안 갖고 있었다고 나를 꾸짖는 것처럼 내게 다가왔었다. 내겐 반박할 힘이 없었다. 날 선 리뷰와 댓글들을 읽는 것은 매우 힘겨운 일이라서 제일 가까운 친구 둘에게 대신 읽어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글의 부정적인 에너지에 전이되었는지, 친구들도 나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한 친구는 너 자신에 관한 글도 읽을 용기가 없느냐고 나를 타박했다. 일거리를 잃은 내게 간단한 번역을 의뢰했던 다른 친구는 단어 하나 잘못 적은 것을 보며 너는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전에는 하지 못했던, 묵혀놓았던 나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냈다. 2012년에 나는 직업을 잃었고, 가장 친하다고 믿었던 친구 둘을 잃었다.




  내가 번역가로서 겪은 삶의 흐름을 이렇게 글로 정리하고 보니 참으로 기구하다는 생각이 든다. 힘든 순간, 위로를 받고 싶었던 친구들에게서 더 큰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더욱 그러하다. 나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얼마나 억울했는지를 토로하려는 것이 아니다. 번역가든, 어떤 직업을 갖고 살든, 개인이 반드시 가져야 할 덕목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너무 평범한 말 같겠지만, 그건 바로 자신감이다. 사실 나는 번역가로 살면서 알게 모르게 자격지심과 그에 따른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소위 명문대를 나오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영어영문학을 전공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했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가 일할 때만 해도 번역가는 꽤 괜찮은 학벌을 요구했다. 좋은 학벌은 어떤 전공이든 상관없지만, 평범한 학벌이라면 영어영문학이라는 전공으로 독자들을 안심시켜야 했다. 이런 발언이 구시대적 발상이라고 반발하는 이들이 많다면 좋겠다. 중요한 건 실력이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높은 학벌에 대한 욕망은 지금도, 어느 분야에서나 예전 못지않은 것 같다. 좋은 학벌은, 무엇보다 없던 실력도 만들어주고 자신감도 자동 탑재시켜 준다. 대체로 그렇다는 말이다. 나는 그런 현실과의 싸움에서 알아서 미리 지고 있었다.




  이렇게 “무명번역가 2. 흥망성쇠기”의 ‘망’과 ‘쇠’를 호되게 겪었지만, ‘흥’과 ‘성’의 행복한 시기도 분명 있었다. 그때에도 나의 개인사에는 굴곡이 있었다. 쉽지 않은 인간관계와 그로 인한 상실감, 예기치 못한 경제적 위기로 인한 실질적 고충. 그러나 내게는 ‘번역가’라는 타이틀이 주는 힘이 있었다. 그래서 밖에서 무슨 일을 겪어도 내게 주어진 번역을 하는 동안에는 그 모든 상념을 잊을 수 있었다. 명품을 좋아하거나 여행을 즐기는 성격이 아니어서 소소한 취미 생활과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의 친분만으로도 만족하며 내 인생을 누릴 수 있었다. 번역가와 같은 프리랜서에게는 일이 끊이지 않고 들어오는 것이 중요하다. 내 번역 인생의 짧은 황금기 동안, 운 좋게도 한 권의 번역이 끝나고 조금 기다리다 보면 다른 번역이 들어오는 사이클이 반복되었다. 가족 생계까지 책임질 의무가 없었던 나는, 나만의 단출한 생활을 가능하게 해 줄 만큼의 돈만 있으면 만족했다. 평생을 그렇게 유유자적하면서 살고 싶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내가 번역을 그만두게 만든 나만의 ‘오역 논란’ 사건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들기 위해 필연적으로 일어났어야 하는 일이 아니었나 싶다. 이 글에 다 담을 수 없는, 이후 십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내가 몸소 겪은 인생의 변화를 떠올리면 말이다. 지금은 좀 더 다양하고 극적인 인생을 살아보라는 이른바 ‘신의 계시’ 같은 것으로 내 인생의 ‘작은’ 불운을 해석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번역을 하면서 자격지심과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 마음을 갖고 평생을 사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어쩌면 나는 ‘번역’이라는 일 자체보다 ‘번역가’로 살면서 만들어낼 수 있는 삶의 양상에 더 매력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번역가의 삶은 내 것일 수 있지만 번역은 내 것이 될 수 없다.




  번역에 관심이 많거나 번역가가 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서 “어떻게 하면 번역가가 될 수 있느냐” “번역가로 사는 것은 어떠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었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이미 번역가가 된 사실에 우쭐하는 마음이 들었었다. 내 대답은 번역가로 행복했을 때와 번역에 마음을 닫았을 때가 각각 달랐는데, 마지막은 늘  “번역가로 사는 건 쉽지 않아요”라는 말로 끝을 맺었었다. 웬만큼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고는 발들이지 말라는 뜻이었다.  번역가로 사는 것에 매력을 느꼈고 평생 그렇게 살기를 바랐다면서, 왜 그렇게 대답했던 것일까? 번역가가 아닌 지금, 오히려 그때보다 더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정성스럽게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무명번역가 3. 후일담”에서 그때 사람들의 질문에 전하지 못했던 진솔한 대답을 풀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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