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곡선이 완연하게 드러나는 흰색 원피스 차림의 프리실라가 노래를 부르며 연단에서 내려온다. 그녀는 회중 속으로 들어가 파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을 앞으로 끌어내어 그녀의 쇄골과 팔을 유려하게 쓸어내린다.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성은 바닥으로 쓰러져 내린다.
프리실라가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장면은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어떤 이는 팔을 들어 몸을 떨면서 비명을 지르고, 어떤 이는 뒤로 쓰러지며 울음을 터뜨린다. 한 여성이 마네킹처럼 몸이 뻣뻣하게 경직되어 움직이질 못하자, 흰색 정장의 진행 요원이 그녀의 몸을 질질 끌어 예배당 구석으로 옮긴다.
고요해진 것도 잠시, 모두가 프리실라의 열정적인 노래에 맞춰 마치 뜀틀 발구름판에 선 것처럼 껑충껑충 뛰어오른다. 프리실라는 동작을 자제하는 듯했지만 곧 함께 뜀박질하며 구호 같은 것을 외치기 시작한다. 다시 몇몇 여성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지거나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비명을 지른다.
어느 순간, 프리실라는 움직임이 어색한 정장 차림의 노인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켜 귀에 뭔가를 속삭인다. 이어 진행 요원이 나타나 노인의 몸을 돌리자 노인은 아이 같이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잔망스럽게 몸을 돌리다가, 멈출 때는 어른의 표정으로 돌아온다. 불안정했던 몸가짐도 차분하게 정돈되어 있다. 회중은 노인에게 힘찬 박수를 보낸다.
가나 수도 아크라의 영성 교회에서 열리는 야간 예배에서 펼쳐지는 광경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와 몸짓으로 예배를 주재하는 16살의 프리실라는 평소에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하는 수줍음 많은 중학생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가나의 유명 인사이고, 많은 가나인들이 그녀의 공연을 보기 위해 줄을 선다. 프리실라는 교회뿐만 아니라 시장 한복판이나 학교 강당, 장례식장 등 무대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공연을 펼친다. 그리고 그곳에는 빙의와 방언, 그리고 신체적 치유도 함께 일어난다.
따라서 프리실라는 단순한 가수가 아니라, 자신의 노래로 청중의 신체와 영혼까지 치유하는 영매 또는 목회자이다. 나는 박사 논문 자료를 찾다가 이 강렬한 장면이 담긴 영상을 만나게 되었다. 곧바로 프리실라에게 매료되었고, 그녀가 지닌 신비로운 능력의 원천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이 가녀린 소녀가 회중을 압도하며 치유하는 능력은 이번 생의 모습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녀의 전생이 드러내는 진실만이 이 모든 신비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가나 아크라의 영성 교회에서 프리실라의 전생 속으로 두려움 없이 빨려 들어간다.
골드코스트, 오늘날 가나가 위치한 그곳은 19세기말부터 1957년 독립이 될 때까지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았다. 1900년대 초, 식민지 고위관리로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골드코스트에 온 영국 소녀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밤이면 저 멀리서 북소리와 방언, 빙의된 자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소녀는 그 소리가 무서우면서도 왠지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것이 펼쳐지는 광경을 직접 보고도 싶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영국인 식민지 개척자들은 기괴한 소리에 소름이 끼쳐했고, 원주민의 이 ‘야만적’ 의식을 악마의 것으로 규정하고 금지했다.
소녀의 아버지는 일에 있어서는 엄격하고 빈틈이 없었지만 가정사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반면, 어머니는 자애롭고 여유로우며 딸의 호기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덕분에 소녀는 식민지 지역을 마음껏 돌아다니며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녀는 기독교 목사이자 피지배자의 신앙도 연구하는 인류학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아프리카의 신앙이 서구 기독교의 전파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한다고 믿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연구를 이어가면서 그는 점차 인간의 영혼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아프리카 신앙 체계에 깊이 매료되었다. 소녀는 인류학자에게 북소리와 춤, 방언과 빙의가 일어나는 밤의 의식에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영국 소녀는 북소리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의식을 주도하는 아프리카 소년을 보게 된다.
의식은, 앞으로는 확 트인 강을 마주하고 뒤로는 빽빽하게 서 있는 나무들에 기댄 것 같은 숲에서 진행되었다. 그녀가 처음 의식을 보았을 때에는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는 흑인들의 눈빛이 간혹 사람의 그것 같지 않아 섬뜩했었다. 일부 사람들이 얼굴과 몸에 흰색칠을 한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다. 참석자들은 북소리와 노래에 맞춰 춤을 추었고 음악이 절정에 달하면 열정적으로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지르거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사람의 말 같지 않은 것을 쏟아냈다. 영국 소녀는 어떤 의미를 담은 노래이기에 이토록 사람들이 강렬하게 반응하는지 궁금했다.
이 강은 고대부터 내려온 것입니다.
강은 무한한 창조주에게서 나왔습니다. 강이시여,
다른 곳으로 갔다면 오세요, 우리는 당신의 길을 찾습니다
창조주에 대한 경외를 표현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묻는 노래라는 걸 알고 나니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행위가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 영국 소녀는 인류학자처럼 많은 것들을 물었고 아프리카 소년은 정보 제공자가 되어 자신의 문화를 설명했다. 원주민들은 소녀가 흰색 원피스를 입고 의식에 참여하여 노래 부르고 춤추고 절정에 이르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딸이 밤마다 이 ‘악마적 행위’에 동참하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소녀의 아버지는 그것을 ‘반역 행위’로 인식했다. 또한,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우정이었던 소년과 소녀의 관계는, 소녀 아버지의 무한대로 뻗어나가는 상상 속에서 기이하게 왜곡되었다. 명예와 성공이 최우선이었던 식민지 관리에게 그런 딸은 있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영국으로 돌아가면 더 높은 지위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굳게 믿고 있던 그의 눈앞에 끝없는 나락이 펼쳐지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배신감과 분노를 이기지 못한 이 식민지 관리는, 자기 손으로 딸을 죽이고 만다.
원주민들의 손에 거두어진 소녀는, 앞으로는 강을 바라보고 뒤로는 나무들의 보호를 받으며 위로는 따뜻한 햇살이 어루만져주는 땅에 안겼다. 돌연한 이동이었지만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들로 장식된 그곳에서 소녀는 안식을 얻었다. 이제 이곳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고, 신생국가 ‘가나’로 탈바꿈했다. 국민들의 마음에 희망이라는 단어가 새겨졌다. 하지만 식민주의 다음으로, 외세는 이 땅에 자본주의를 들여왔다. 독립은 허울뿐인 것으로 증명된 지 오래였고, 이 땅은 다시금 새로운 종속 상태에 들어서게 될 터였다. 해마다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소녀를 기분 좋게 간질였던 청년들의 노랫소리가 사라지기 전에 꽃무덤은 서둘러 기지개를 켰다.
가나도 영국도 아닌 한국이라는 제3국의 여성은 가나 수도 아크라의 영성 교회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통해 100년도 더 넘는 과거의 공간 속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프리실라가 영국 소녀였고 영국 소녀가 프리실라로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을, 눈 밝은 독자들은 이미 잘 알고 있으리라. 그러나 이 이야기는, 어쩌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전생일 수도 있다. 같은 전생을 가진 다른 분신인 나는 이렇게 아프리카 이야기를 세상에 전할 임무를 갖고 다시 태어났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