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23년 8월에 아프리카학 박사가 되었고, 1년 뒤인 2024년 8월에 극락전 보살이 되었다.
아프리카학, 극락전. 이 모두가 범상치 않게 느껴질 것이다. 나도 그렇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나는 내가 아프리카학 박사가 될 줄 몰랐고, 이 글을 쓰기 석 달 전만 해도 나는 내가 극락전 보살이 될 줄 몰랐다. 그러나 사람이 예상한 대로만 흘러간다면, 그건 ‘인생’이 아닐 것이다. 그 말은, 내가 치밀한 계획을 갖고서 아프리카학 박사가 되고 극락전 보살이 된 게 아니라는 뜻이다. 모두 우연한 계기와 자연스러운 흐름이 어우러져 빚어낸 결과였다.
먼저 어떻게 해서 아프리카학 박사가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계산법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나는 여차저차해서 대략 10년 정도를 번역가로 살았다. 영어 도서를 번역했지만 불어 문장도 많이 접하면서 불어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2011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불어불문학과 2학년으로 편입했다. 공부가 이렇게 재밌을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 졸업할 무렵에도 나는 더 공부하고 싶었고, 때마침 학과 교수들은 석사과정 설치를 적극 추진하고 있었다. ‘불어불문학’만으로는 정부의 인가를 받기 쉽지 않다고 판단한 교수들은 아프리카에 프랑스의 옛 식민통치 국가들이 많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프리카·프랑스언어문화학과”라는 매우 독특한 이름의 학과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나는 2014년에 대학원 2기로 그 과정에 입학했다. 아프리카와 프랑스의 이른바 ‘투트랙(two track)’으로 구성된 커리큘럼이 제공되었다. 불어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된 공부였지만, 나는 주저하지 않고 내 인생에 새롭게 등장한 아프리카를 선택했다. 그리고 자신을 설명하는 데 ‘독특한’이란 형용사가 빠지지 않는 학우들과 흥미진진한 학창생활을 40대에 들어서야 영위하게 되었다. 인생의 즐거움 역시 이때 처음 제대로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현실은 엄혹했다. 2년 반의 공부 끝에 석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아프리카에 대한 얄팍한 지식만으로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세상에 없었다.
2019년, 다른 대학교의 아프리카학 박사 과정에 입학했다. 2년의 학위과정과 2년의 논문작성, 반년의 심사과정을 거쳐 4년 반 만에 ‘아프리카학 박사’가 되었다. 석사 과정 때처럼 학우들과 즐겁게 어울리진 못했지만, 공부에 흠뻑 빠져 지낸 시간이었다. 그 시절은 외로웠지만 ‘아프리카학 박사’라는, 아무나 쉽게 가질 수 없는 타이틀을 내게 안겨 주었고, 나는 그 사실에 감사한다. 그러나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는데, 이번에도 시간강사 자리 하나 구할 수 없는 암담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도교수에게 여러 차례 부탁했지만, 기존 강사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개정된 ‘강사법’ 탓에 신규 채용이 힘들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계속 공부하는 것밖에 없었다. 몇 편의 학술논문을 작성해서 투고했고, 통과된 논문을 학회에서 발표했다.
앞이 환히 밝혀지지 않은 길을 무작정 걷는 심정이었지만, 가슴 한편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제도권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누락된’ 신진 연구자들을 구제하는 “학술연구교수” 제도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학술연구교수가 되면 정부의 경제적 지원을 받으면서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껏 하고, 대외적으로는 자신을 ‘교수’라고 소개할 수 있었다. 나는 아프리카 대중음악과 철학을 결합한 연구로 아프리카 디아스포라의 문제까지 해결하는 야심 찬 목표를 내세웠다. 지도교수도 좋은 주제라고 하면서 수정작업을 도와주었다. 논리 정연하고 빈틈없는 연구계획서가 만들어졌다. 사실, 내게는 학술연구교수가 되어야만 하는 또 다른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올해 2024년 초, 아빠가 하반신이 마비되고 끝을 기약해선 안 되는 투병생활에 돌입하셨다. 나는 내가 병원비를 책임질 생각이었다. 5월 말, 학술연구교수 명단에 내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절망에 빠진 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예전만큼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은 상황에서, 나는 네 자매들 중에서 그나마 내가 가장 희망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빠는 우리의 걱정을 알기라도 하셨던 것처럼 6월 중순, 너무나 가볍게 이 세상을 훨훨 날아 떠나셨다.
이제 아프리카학 박사인 내가 극락전 보살이 된 경위를 밝힐 때가 된 것 같다. 나는 종교 질문을 받으면, 절에 다니진 않지만 심정적으로 불교에 가깝다고 대답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20년 전, 불교대학을 다녔고 ‘보문행(普門行)’이라는 법명을 받은 이력이 있다. 불안하거나 뭔가를 바랄 때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는 습관도 있으니 ‘날라리’ 불자는 아닐 터이다. 아빠가 병석에 계시게 되면서 절에 정기적으로 다니게 되었고, 언젠가 이별의 순간을 맞게 되면 꼭 좋은 곳으로 ‘천도’해 드리겠다는 서원도 세웠다. 망자를 위해 불교에서 행하는 이 천도의식을 ‘49재’라고 한다.
나는 아빠가 2,3년은 더 우리와 함께 계실 거라 생각했지만, 이별은 급작스럽게 찾아왔다. 생각해 보면 그때가 아빠와 우리 모두에게 ‘적절한’ 시점이었던 것 같다. 예견했던 아빠와의 이별 시점은 한참 뒤였지만, 철저한 준비성 덕분에 갑자기 가신 뒤에도 모든 절차를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었다. 그토록 해드리고 싶었던 49재도 잘 치를 수 있었다. 첫재를 마치고 아빠는 잠결의 내 입을 통해 “고마워, 내 딸로 있어줘서”라고 하셨다. 49재 기간, 아빠와 나는 텔레파시로 많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그중엔 “나는 여기서 잘 지내고 있지”라는 편지도 있었다. 아빠가 가시고 100일이 훌쩍 지난 지금은 통신이 끊어졌는지 연락이 없다. 내가 닿을 수 없는 아주 높은 곳, 좋은 곳에 계신다는 신호, 이제 나도 새로운 삶을 살라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일주일, 7일마다 7번 지내는 49재 기간에 나는 스님들을 보조하며 ‘재’를 진행하는 극락전 보살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49재가 끝나면 한적한 절에서 한 달 정도 머무르고 싶다는 마음을 밝혔다. 정말로 절에 갈 생각이 있어서라기 보단, 지친 마음을 의탁하고 뭔가 새로운 것을 찾고 싶은 마음에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이에 눈치 빠른 보살님은 아빠를 모신 이곳에서 봉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거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영가님들의 ‘위패’가 모셔진 단을 흰 행주로 닦고 있는 내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운명이었다.
극락전 보살로 산 지 이제 두 달이 되어간다. 나의 극락전 보살 생활은,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법당 청소로 시작되었다. 기름 대걸레를 밀면서 그 큰 법당을 왔다 갔다 하다 보면 금세 바닥에서 윤이 나는 게 보인다. 그 밖에도 영가님들이 어둠 속에서 길을 헤매지 않도록 촛불을 켜고, 사시(10시)에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마지’를 한다. 얼마 전부터는, 직원으로 일하는 극락전 보살님이 부득이하게 자리를 비울 때를 대비해서 ‘재’를 주재하는 방법을 조금씩 배우고 있다. 많은 음식과 과일의 제사상을 차리고, 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절하거나 독경하는 것을 알려주고, 뒷정리를 하는 일 등등. 아빠의 49재를 할 때는 이 일이 이렇게 품이 많이 드는 일인 줄 몰랐다. 일주일에 두어 번 도울 뿐인데도 하고 나면 온몸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심하게 저리다. 육체노동은 정신노동보다 쉬울 거라고 믿었던 나의 ‘오만과 편견’이 철저하게 깨지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렇게 봉사를 하면 “공덕을 쌓고 부처님의 가피를 얻게 된다”고 한다. 봉사 전에 나는 그런 사실을 몰랐었다. 특별히 무엇을 바라고 한 게 아니었기에 그 말은 내게 선물처럼 느껴진다. 사실, 난 이미 부처님의 가피를 받았다. 아프리카학 박사로서 가야 할 길을 극락전 보살 일을 하면서 뚜렷하게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아프리카에서는 유일신의 기독교와 이슬람이 널리 퍼져 있지만,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아프리카인들에게 유일신 신앙은 없다. 오히려 환생과 윤회를 믿는 그들의 사후 세계관은 불교의 영혼 불멸 사상과 닮아있다. 불교에서는 평범한 우리도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인은 인생을 잘 살아온 사람이 죽은 후 '조상신'이 되어 공동체를 지킨다고 여긴다. 선한 행위를 하면 선한 업보를 받고 그렇지 않은 행위를 하면 나쁜 업보를 받는다는 아프리카인의 믿음은 불교의 인과 법칙, 즉 카르마(업보)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식민 통치를 위해 기획된 서구 학자들의 연구는 이러한 아프리카의 종교와 철학을 의도적으로 가리는 경우가 많았다. 극락전 보살이 된 아프리카학 박사로서 외면해선 안 될 연구 주제임이 분명하다.
돌이켜 보니, 내가 아프리카학 박사가 되고 극락전 보살이 되도록 이끈 우연한 계기와 자연스러운 흐름에 좌절과 슬픔, 도전과 성장이 함께했던 것을 알겠다. 때때로 피곤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삶의 중요한 가르침을 얻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평범하고 안정된 삶을 꿈꾸기도 했지만 나의 여정은 항상 나의 바람과 다르게 흘러왔고, 앞으로도 계속 변화의 물결 속에서 살아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모든 변화 속에서 나는 배우고 성장할 것이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 나의 몫임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