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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프로마치 Oct 26. 2024

아빠의 죽음 2. 간병인 문제


  아빠는 종합병원에서 2월 11일부터 3월 8일까지 한 달이 조금 안 되는 기간을 지내셨다. 그곳은 매일 보호자 2인이 1시간 동안 면회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런데 우리는 아침과 저녁, 몇 시간이고 아빠 곁에 머무를 수 있었다. 간호사들의 암묵적 용인 덕분이었다. 아빠는 수술 후 섬망 증상으로 인해 의료진에게 피해망상을 드러내셨고, 밤에는 잠에 들지 못해 힘들어하셨다. 그래서 큰언니가 1인실이 되어버린 5인실에서 아빠와 함께 잠을 잔 적도 있었다. 언니들과 나는 매일 돌아가며 아빠를 아침저녁으로 돌봤다.


  때는, 정부의 이른바 “의료개혁”에 반발하여 전공의들이 이탈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10월이 된 지금까지 계속될 줄 몰랐던 이 의료사태에 병원 운영진과 의료진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나의 추측인데, 병원이 비교적 심각하지 않은 입원 환자들에게 퇴원을 유도하는 것 같았다. 통증과 질환이 있지만 종합병원의 특별한 조치까지는 필요하지 않은 환자가 되어버린 아빠에게는 요양병원이 다음 행선지가 되었다.




  우리는 집에서 말 그대로 신호등 하나만 건너면 닿을 수 있는 A요양병원을 택했다. 종합병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매일 같이, 그러나 좀 더 편하게, 아빠를 돌볼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모든 요양병원의 면회는 일주일에 단 한 번, 그것도 30분으로 제한되었고, 종합병원보다 더 완고하게 지켜졌다. 원무과장의 설명을 들으며 실망하는 것도 잠시, 우리는 정말 생각하지도 못한 시련을 마주하게 되었다.


  침대째 병동으로 옮겨진 아빠를 본 간병인이 아빠의 몸집을 보고 “못하겠다”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종합병원에서는 여자 요양사들이 아빠를 돌봤는데? 병원에서 하라고 하면 안 되는 건가? 원무과장은 이런 상황에서는 간병인이 ‘갑’이 되고 요양병원이 ‘을’이 된다고 했다. 일단 간병인은 요양병원 직원이 아니었다. 한국인이 기피하는 간병인 자리를 잠식한 조선족 간병인들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앞뒤 재지 않고 그 자리에서 짐을 쌌다. 아빠 때문에 간병인이 나간다면, 아빠는 공공의 적이 되는 것이었다. A요양병원은 아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3월 8일 오후 5시의 하늘엔 이미 어둠이 드리웠다. 초봄이지만 여전히 추웠다. 그 밤거리에서 침대에 누워계시는 아빠의 이미지가 문득 떠올랐다. 큰언니, 셋째 언니, 나, 이 세 사람이 참담함과 무력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동안, 원무과장은 다른 요양병원을 알아봐 주겠다며 전화를 돌리고 있었다. 요양병원들은 사정을 듣고 모두 고개를 저었다. 원무과장은 다른 곳이 정해질 때까지 이곳에 머무르실 수 있게 해 드리겠다고 했다.


  우리도 각자 발 빠르게 이곳저곳을 알아보았다. 속으로는 A요양병원 간병인이 마음을 바꿔서 아빠를 계속 돌보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아빠에게는 이런 사정을 말씀드리지 않은 채, 조금 불편하셔도 최대한 그곳에 적응하면서 간병인과 잘 지내시라고 당부했다. 더불어 종합병원에서처럼 섬망 증상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아빠는 종합병원에 비해 열악한 환경과 맛없는 음식, 그리고 군대 같은 병동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어하셨다. 면회가 제한된 상황에서 아빠와의 의사소통은 휴대폰을 통해 이뤄졌다. 통화 때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빠는 “나, 언제 집에 갈 수 있어?”라고 물어보셨다. 애간장이 타들어갔다.


  다행히 셋째 언니가 B요양병원을 찾아냈다. 그러나 3월 13일에 전원을 하고 불과 하루 만에 A요양병원에서와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우리 아빠가 마치 초고도 비만자인 것처럼 상상될 것이다. 그러나 아빠는 젊었을 적, 키 178센티미터에 넓은 어깨와 호리호리한 몸매를 지녔었다. 다만 연세가 드시면서 키는 175 정도로 줄어들었고, 허리가 아파 집에만 계시면서 배가 좀 나오게 된 것뿐이었다. 요양병원 간병인은 거의가 160대 중후반 정도의 키에 왜소한 몸집을 지녔다. 그래, 그들에겐 아빠를 돌보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간병인 문제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C요양병원을 발견했다. 아빠는 3월 20일부터 6월 16일까지, 여생을 그곳에서 보내시게 된다. 이곳 간병인 오선생님은 정말 좋은 분이었다. 처음엔 조선족의 억센 말투 때문에 오해한 적도 있었지만, 아빠를 진심으로 돌보시는 게 느껴졌다. 집에 그토록 오고 싶어 하셨던 아빠도 정성스러운 오선생님에게 많이 의지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으시는 게 보였다. 그러나 오선생님이 요양차 열흘 정도 자리를 비우고 다른 간병인이 대체한 적이 있었다. 생각해 보니, 아빠가 본격적인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게 그 일이 있었던 5월 중순 무렵이었던 거 같다. 이번에는 반대로 아빠가 돌아온 간병인을 밀어내셨다. 아빠는 오선생님이 당신을 두고 떠난 사이 많이 외로우셨던 모양이었다.




  요약하자면, 불과 12일 만에 A요양병원에서 B요양병원으로, B요양병원에서 C요양병원으로, 아빠는 두 번이나 이동하셨다. 그 사이에 우리 자매는 처음으로 ‘의견 차이’라는 것을 겪었다. 늘 아빠를 사랑했던 원래 효녀 셋째 딸과 이제야 아빠를 알게 된 늦깎이 효녀 막내딸의 갈등이었다. 전원을 할 때마다 셋째 언니는 아빠에게 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아빠 마음 다치지 않게 ‘아빠몸’과 ‘간병인’을 언급해서는 안 되었다. 특히 아빠가 마음에 들어 하셨던 B요양병원에서 C요양병원으로 옮길 땐 아빠가 납득하실 만한 전원 이유를 만들어야 했다. 언니는 ‘그곳의 맑은 공기’는 어떻겠느냐고 내게 물었다. 한심해 보였다. 정확한 사실을 알려서 아빠로 하여금 간병인이 협조적으로 나올 수 있게 행동하도록 해야 했다. 그런데 언니 방식대로라면 아빠가 세상 물정 모르고 불평을 터뜨리다가 병원에서 모시기 힘들다는 말이 나올지도 몰랐다. 나는 그게 싫었다. 아빠가 당신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거부’ 당하는 것이...


  나는 내가 그렇게 ‘강성’인지 몰랐었다. 어떻게든 내 생각을 관철시키고자 말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셋째 언니는 나만큼 자기 의사를 관철시키려고 하지 않았지만 내 행동에 적잖이 당황하며 마음 상해하는 눈치였다. 큰언니는 우리 둘이 의견은 다르지만 아빠에 대한 마음은 같다면서 둘 사이를 중재하려고 애썼다. 그때까지 나는 복잡한 병원 일들을 주도적으로 처리해 왔고, 아빠 역시 내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모습을 보이셨다. 나는 언니들 앞에서 오만해져 있었다. 이성적인 내가 앞뒤 사정 생각하지 않고 감정에 휘둘리는 언니들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내가 다 옳았고, 다 나를 따라야 했다. 우스갯소리로, 아직도 유행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MBTI 성격유형검사의 극단적 T(Thinking, 사고)의 행태를 보이고 있었다.




  아빠가 그렇게 허무하게, 금방 가실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한 번은 C요양병원에서 아빠가 오선생님을 ‘거부’하는 것을 보고 내가 말했다. “아빠는 저 간병인 선생님처럼 다른 사람 뒤치다꺼리한 적 있어?” 아빠는 ‘아니, 이 놈이?’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곤 말씀하셨다, “너, 다시는 오지 마!” 내가 대답했다, “오라고 해도 안 와!” 그러나 곧 나는 아빠 품에 얼굴을 묻고 있었고, 아빠는 “이 녀석, 애교는...” 하며 웃고 계셨다. 아빠가 간병인을 거부해도 병원은 아빠를 쫓아내지 않았고, 내가 아빠한테 버릇없이 굴어도 아빠는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아빠는 아빠 몸 때문에 간병인이 아빠를 거부했다는 얘기를 듣고도 상처 입지 않으셨다. 하지만 셋째 언니의 방법을 사용했다면 가실 때 아빠의 마음이 더 가볍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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