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6일 02시 02분, 아빠가 돌아가셨다. 자식 누구도 임종을 함께 하지 못했다. 자유로를 급하게 달려 요양병원에 도착했다. 아빠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인 채 잠에 드신 것처럼 보였다. 흔들면 금방이라도 눈을 뜨실 것 같았다. 몸에도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간호사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며 우리를 내보냈다. 2,30분 뒤, 아빠는 흰 천으로 몸이 칭칭 동여매어진 뒤에야 그토록 나오고 싶어 하셨던 병원 밖으로 나오실 수 있었다.
2024년 1월 29일, 아빠는 다리 통증을 호소하셨다. 병원에 가고 싶다고 하셨고, 나는 조금만 지켜보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시간이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88세의 아빠는 4,50대 때부터 허리가 안 좋으셔서 수술도 받으셨고, 때론 걷지를 못해 괜찮은 마사지사를 수소문해서 나아지게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사흘 뒤에 아빠는 또 다리에 힘이 없다고 하셨고, 이러다 앉은뱅이가 될 거 같다고 하셨다. 나는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시라고 했다. 내 머릿속은 온통, 아빠에게 정말 문제라도 생기면 어떡하지, 지금 우리 형편이 다 좋지 않은데, 왜 하필이면 이때, 제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언니들에게는 아빠가 다리가 아프신 사실을 전하면서도 곧 괜찮아지실 거라며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다.
2024년 2월 10일, 새해 차례를 언니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엄마, 아빠를 모시고 현관을 나섰다. 나는 목발을 짚은 채 신발을 신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아빠 옆에 있었다. 그런데 문밖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엄마가 어지럽다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벽에 기대어 괴로워하고 있었다. 왼쪽 끝의 엄마와 오른쪽 끝의 아빠 사이에서 역삼각형 꼭짓점처럼 서 있던 나는,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라고 소리쳤다. “꽈당!” 어떻게든 신발을 신어보려고 발버둥 치던 아빠가 나자빠져 계셨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아빠는 뒤로 넘어졌는데 발목뼈가 부러졌다고 했다. 2월 13일, 집 근처 종합병원에서 발목뼈 접합 수술을 했다. 2월 14일 새벽 1시, 레지던트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빠가 다리에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셨다고 했다. MRI 정밀 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2월 14일 오전 11시, 앞으로 아빠의 주치의가 될 정형외과 전문의와 긴급 면담을 했다. 디스크 1,2,3번 협착이 심각하여 신경이 지나가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신경 손상, 나아가 하반신 마비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협착으로 마비가 되는 경우는 없기에 아빠는 특이 케이스, 즉 역치를 벗어난 상태이며 수술이 시급하다고 했다. 신경이 살아난다는 보장은 없지만 혹시 모를 가능성을 살리기 위해, 신경의 통로를 열어주는 감압술을 기반으로 한 수술을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고령 환자라 수술 후 합병증이 걱정되지만, 의사는 자기 부모여도 할 수술이라고 했다.
내 관심은, 의사가 아빠의 신경을 살려내는 것보다 아빠가 이틀 연속의 전신마취를 이겨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수술 후, 아빠 다리가 기대했던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에 속상해하는 의사의 브리핑을 들으면서도 나는 기뻤다. 아빠가 살아 돌아오셨으니까. 의사는, 마취가 덜 풀린 상태에서 잠에 들지 못하도록 아빠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라고 했다. 우리는 아빠에게 아빠 본인과 아내, 딸, 손주, 사위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물어보았다. 제대로 대답하면 제대로 대답해서 예뻤고, 잘못 대답하면 잘못 대답해서 귀여웠다.
아빠를 버거워했던 딸이 ‘저런 효녀’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 급격한 변화를 설명하긴 힘들다.
며칠 뒤면 집에 돌아갈 거란 기대에 차 있던 아빠는 ‘때’를 기약하지 못한 채 꼼짝없이 병원에 머물러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하반신이 마비되었기 때문에 집에서 보살펴 드릴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나게 된 것이다. 원래 아빠에게는 기저질환으로 신장과 비뇨기에 문제가 있어서 1년 전에 소변줄을 찬 적이 있었다. 이젠 하반신이 아예 마비되었으니 소변은 물론 대변까지 의지대로 처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소변줄과 기저귀가 아빠 삶의 ‘기본값’이 되어 버렸다.
소변줄은 소변이 가득 찼을 때 주머니를 갈고 한 달에 한 번 주삿바늘을 갈면 되었지만, 기저귀는 수시로 갈아야 하는 것이었다. 이는 요양사 여사님의 몫이었다. 그러나 연세에 비해 키가 크고 몸집이 있으신 아빠를 그보다 작은 몸집의 요양사가 감당하기는 힘들었다. 나는, 병원에 있을 때면, 꼭 요양사님과 함께 아빠 기저귀를 갈았다. 척추 수술 후 통증이 채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야 하는데, 어떤 요양사는 힘을 조절하지 못해서 아빠를 아프고 짜증 나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요양사가 나가고 나면 아빠는 “네가 더 잘해”라고 하시며 나를 추켜세우셨다.
딸에게 자신의 모든 것, 부끄러움을 넘어 수치스러울 수 있는 것까지 모두 내보여야 하는 아빠의 심정이 어땠을지를, 그때는 전혀 헤아리지 못했다. 가끔, 아빠가 내 인생에서 한 번도 키워본 적 없는 내 ‘큰’ 아기 같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묘해진 적은 있었지만 말이다. 처음에는 아빠도 몸을 조금 틀거나 얼굴을 찡그리며 자신의 몸을 내놓는 것에 대한 심적 저항을 드러내기도 하셨다. 하지만 갈수록 아빠는 내려놓으신 건지, 아니면 그때 이미 인지기능이 퇴화되고 있었던 것인지, 사람들의 손길에 순순히 몸을 내맡기셨다. 아, 그때도 기저질환으로 인한 수술 후 합병증 때문에 신체 일부가 기형적으로 변한 것에 대해 나와 주치의에게 참담함을 토로하신 적이 있었다. 아빠는 당신의 몸을 두고 가질 수 있는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고 계셨던 것이다.
돌아가신 지 1년도 안 된 아빠에 대해 이렇게 가감 없이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내보여도 괜찮은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때부터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넉 달 동안 아빠와 나눈 대화가 평생 아빠와 했던 대화보다 더 많다고 느낄 만큼, 아빠와 나는 그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 기간은 우리 둘 사이의 매우 뜻깊은 시간이었고, 그것을 글이라는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내게는 어쩌면 당연한 의무일 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아빠는 내 이름에 관해 몰랐던 사실을 가르쳐주셨다. 아빠가 정은의 ‘정’을 여자 이름에 잘 쓰지 않는, 정치를 뜻하는 ‘政’으로 쓴 것은, 내가 넓은 세상에서 당당하게 활동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빠는 당신이 90년을 살‘았’으니 나는 100년은 살 수 있을 것이고, 앞으로 50년 동안 활발히 활동하게 될 거라고 예언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얼마나 멋있을까. 그걸 보지 못하는 게 아쉽구나.”
아빠의 죽음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아빠를 추모하는 나름의 방식이다. 딸은 아빠 때문에 자기 인생까지 힘들어졌다고 믿으며 아빠를 원망한 적이 있었다. 그랬던 내가 아빠에 대한 추모를 이 한 편의 글로 마무리하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아빠의 죽음이 내 인생에 미친 영향이 만만치 않다. 쓰고 보니 이 작업이 생각보다 훨씬 쉽지 않다는 걸 느낀다. 앞으로 써나갈 글들의 여정은 이보다 더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계속 나아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