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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경 Jul 20. 2023

아기에게 '오, 사랑'을 들려주며

참을 수 없는 음악의 느끼함

나에게 취미가 뭐냐고 묻는다면 참으로 식상하게 독서와 음악감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글쓰기는 직업이 되면서 애증의 관계가 돼버렸고 취미라고 말하긴 어렵다. 어느 날은 글을 쓰고 싶어 안달이 나지만 어느 날은 쓰기 싫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독서의 경우는 글쓰기보다는 복잡한 감정이 들지 않는다. 다만 글을 읽다 보면 '어떻게 이렇게 쓰지?', '나도 이런 식으로 써볼까?'부터 시작해서 '이 작가 엄청 금수저겠지?'따위의 번잡한 생각이 들긴 한다. 아무래도 글쓰기와 관련된 행위라서 그런 것 같다.




그렇다고 음악을 들을 때 아주 순수한 마음만 있는 것 역시 아니다. 내가 음악에게 느끼는 단어를 고르자면 '선망'과 '견딜 수 없음'일 것이다.


선망부터 말하자면 나는 음악 하는 사람들을 선망해 왔다. 정확히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합주를 하면서 서로를 쳐다보면서 웃는, 그 순간을 선망했다. 누군가는 노래를 부르고 다른 몇몇의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악기를 연주한다. 그것들이 조화롭게 선율을 이루면서 청취자들도 그 음악에 빠져들고 있고, 그들 역시 자신들이 연주하는 음악에 빠져드는 순간. 그때 그 미소는 나에게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 사실 그런 순간을 살 수 있다면 돈은 없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 웃음을 보기 위해, 사람 많은 곳을 질색하고 '떼창' 혐오가 있는 나임에도 공연장을 찾아다녔다. (20대 후반에는 떼창을 할 수 없는 재즈 연주를 하는 곳들을 자주 가게됐다.) 연주를 하면서 필시 연주자들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웃기 마련이고 나는 그 순간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했다. 나도 저렇게 살아갈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나에게 음악적 재능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음악에 대해 '견딜 수 없음'은 무슨 감정인가.

그들이 선율을 맞추면서 동시에 활짝 웃는 모습을 보면서 가끔은 내가 보면 안 될 것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도 가끔 이런 순간이 찾아오긴 한다. 내가 어렴풋이 생각했던 감정들을 철학적 개념으로 아주 말끔히 설명해 주거나, 내가 이전에 했던 어떤 생각이 완전히 다른 영역의 생각과 맞닿아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때도 이런 비슷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했다. 그래서 나는 누가 앞에서 TV를 보거나 유튜브를 틀어도 오히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긴 하다.


다시 '견딜 수 없음'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그렇게 그들의 웃음은 나에게 선망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야하고 느끼해서 내가 쳐다보기 민망한 경우도 있다.


이 감정이 꼭 공연을 가야지만 느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좀처럼 가사가 있는 음악을 듣기 힘들어하는 편이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가사를 쓰는 몇몇 음악가들이 있지만 (개코의 '논해' 같은 노래들) 보통은 내가 알아듣기 힘든 나라의 언어로 쓰인 노래나 재즈 연주를 즐겨 듣는 편이다.


그런데 가끔은 아주 느끼한 가사를 가진 조용한 노래를 들을 때도 있다. 오지은 1집에 수록된 노래들이나 루시드폴의 노래들이 그렇다. 얼마 전에는 아기를 재울 때 루시드폴 노래를 틀어주면 좋아할 것 같아서 오랜만에 루시드폴의 앨범을 듣는데 '오, 사랑'은 다시 들어도 견딜 수 없이 느끼했고 눈물이 절로 흐를 정도였다.


고요하게 어둠이 찾아오는 이 가을 끝에 봄의 첫날을 꿈꾸네
만리 넘어 멀리 있는 그대가 볼 수 없어도 나는 꽃밭을 일구네
가을은 저물고 겨울은 찾아들지만 나는 봄볕을 잊지 않으니
눈발은 몰아치고 세상을 삼킬 듯 이 미약한 햇빛조차 날 버려도
저 멀리 봄이 사는 곳 오, 사랑
눈을 감고 그대를 생각하면 날개가 없어도 나는 하늘을 나네
눈을 감고 그대를 생각하면 돛대가 없어도 나는 바다를 가르네
꽃잎은 말라가고 힘찬 나무들 조차 하얗게 앙상하게 변해도
들어줘 이렇게 끈질기게 선명하게 그대 부르는 이 목소리따라
어디선가 숨쉬고 있을 나를 찾아
네가 틔운 싹을 보렴 오, 사랑


이 노래는 노래도 노래지만 가사를 보면 '와, 어떻게 이렇게 쓰지?' 싶다. 이 노래가 이적의 '다행이다'처럼 루시드폴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쓴 편지라는 이야기는 꽤 유명하다.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다)


건조하고 현실적인 내 특성상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런 사랑 표현은 잘하지 못하는 편이다. 아니 사실 이런 글을 쓰는 감성 자체가 나에겐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동시에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편지를 준다고 해도 너무나 부담스럽고 느끼해서 좋기만 한 기분일까 싶기는 하다.


이런 큰 감정들을 받고 내가 어떻게 감동을 해줘야 하지? 이런 생각들이 먼저들면서 상황을 회피하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역시 이러한 감정도 받을 줄 아는 사람에게만 줄 수 있는 것 같다. 선물이나 칭찬도 받을 줄 아는 사람에게만 할 수 있듯이 말이다. 나는 선물과 칭찬은 아주 기뻐하며 잘 받지만 느끼한 감정은 아직 잘 받지 못하는 수준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을 선망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견딜 수 없기도 하다. 그러나 이 노래를 아기에게 자주 들려주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비록 엄마는 이런 느끼한 가사를 견딜 수 없는 사람이지만 아기 너는 이런 사랑 편지를 쓸 줄 아는 사람과 찐하게 사랑하렴.


https://www.youtube.com/watch?v=NUCqFxW0X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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