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가 말하는 '자연 재생 에너지'
육아 휴직을 하고 에세이를 써보고 있다. 휴직을 한 뒤에도 기사를 쓰던 빈도보다는 적지만 그와 비슷하게 생활 에세이를 쓰고 있다.
나도 내가 휴직을 하고 이렇게까지 뭔갈 계속 쓸 줄은 몰랐다. 그렇다면 난 왜 기사를 쓰는 것처럼 에세이를 쓰고 있는 것일까?
물론 브런치 플랫폼에 글을 쓰는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듯 '내 책을 내보고 싶다'는 욕구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책을 내야지!'라는 생각으로만 에세이를 쓰는 것은 아니다.
이는 일종의 실험이기도 하다.
기사에는 당연히 기자의 편향이 들어가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면' 그것을 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회부라면 그날 자신이 맡은 지역에서 벌어진 일을 쓴다. 정치부 기자라면 자신이 담당하는 당의 대표나 주요 인물들이 하는 말을 전달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이 맞는지 체크하고 비판하기도 한다.
기사의 방향성은 기자나 신문사의 편향과 의견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기사의 '시작'은 어찌 됐건 '바깥의 사건'일 수밖에 없다.
나는 글의 시작이 '내 안의 사건'인 글을 써보고 싶었다. 기사의 필수요소인 '시의성'을 들어낸 글을 써보고 싶었다.
또한 내가 내 안에서부터 시작되는 글을 얼마나 오래 지속하여 쓸 수 있는지 궁금했다.
다시 말해, 나는 바깥의 사건과 관련 없이 지속가능한 글쓰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인가? 에 대해 궁금했다.
어렴풋이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에세이를 써왔는데, 최근 다시 읽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도 비슷한 대목을 찾아 너무나 반가웠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757713&start=pnaver_02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하루키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의 초기 소설은 대단하지만, 후기 작품은 소설로서의 잠재력이 떨어진다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쓴다.
"항상 외적인 자극이 필요했던 것이겠지요. 그런 삶의 방식은 하나의 전설이 되기는 하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체험이 부여해 주는 다이너미즘은 역시 조금씩 저하합니다. (...)
그에 비해 묵직한 소재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내측에서 스토리를 짜낼 수 있는 작가라면 도리어 편할지도 모릅니다. 자기 주위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나 매일매일 눈에 들어오는 광경, 일상생활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소재로서 자신 안에 받아들이고 상상력을 구사하여 그런 소재를 바탕으로 자기 자신의 스토리를 꾸며나가면 됩니다.
아, 이건 말하자면 '자연 재생 에너지' 같은 것이군요. 굳이 전쟁터에 나갈 필요도 없고 투우를 경험할 필요도 치타나 표범을 향해 총을 쏠 필요도 없습니다."
'자연 재생 에너지'. 나 역시 일상생활에서 건져낸 글쓰기가 '무한 동력'같은 느낌이 들어 이 동력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실험해보고 싶었다.
물론 하루키는 소설을 쓰는 사람을 말한 것이고, 자신의 에세이를 '맥주 기업이 만드는 우롱차 같은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에세이에 대해서는 다소 가볍게 여기는 것 같지만, 하루키가 말하는 글쓰기 방식에 대해 매우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종종 에세이 역시 시의성을 의식하면서 써야 더욱 많이 읽힌다는 사실을 직면하기는 한다. 그래도 휴직 중 글쓰기는 매우 다행스럽게도 '얼마나 읽힐지'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언제까지 내 안에서 글쓰기 소재를 퍼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집중해도 된다. 나의 실험이 얼마동안 지속될지 스스로도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