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인지가 잘된다는 것: 비판받을 만한 곳에 미리 가 있기
어떤 글에 눈길이 가고, 오래 읽을까. 나의 경우 '메타 인지'가 잘되는 작가의 글을 보면 '조금 더 읽어볼까'라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최근 한정현 작가의 '환승인간'이라는 에세이를 읽게 되었다. 책을 고른 이유는 '환승인간' 뒤표지에 쓰여있는 말 때문이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62834896&start=pnaver_02
나 자신과 지내다 보니 하나의 특기 정도는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발견한 특기는 바로 '환승'이다. (...) 내게 다른 이름들은 위안 같은 거였다. 가령, 한정현이 좀 제대로 못 해도 이보나가 나머지를 해내면 되지 않을까. 반대로 경아나 제인이 좀 잘못해도 한정현이 잘 해내면 최악을 면할 수 있다. 나는 무수한 이름을 만들어냈고 환승을 거듭하며 적어도 그 안에서는 조금 더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나 자신이 많으면 많을수록 한 명이 비대해지지도 않았고, 그러다 보니 숨을 공간이 많아졌다. 이름이 많을수록 숨 쉬기 좋다.
나 역시 최근에 엄마인 나, 회사원인 나, 아내인 나, 딸인 나,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 등 여러 개 자아로 살면서 오히려 자유로움을 느낀 경험이 있어서 이 글에 공감이 갔다.
그래서 이 책을 집어 들게 되었는데 가벼운 에세이를 상상한 것과 달리 프롤로그는 꽤 비장한 내용이었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 속 여성 시인이 프롤로그에 등장하는데 독재정권의 폭력에 피해 화장실에서 살아남은 이야기였다. 그 뒤로도 국가폭력 피해자의 이야기와 그들이 거대한 폭압에 맞서 시를 읽는다는 내용이 써져 있는데 내가 생각한 에세이의 결에 비해 매우 비장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엇, 에세이라서 가벼울 줄 알았는데 꽤 무거운 글이잖아?'라고 주춤한 때였다. (무거운 글을 무조건 피하는 게 아니라, 당시 그 시간엔 가벼운 글을 읽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런데 프롤로그 이후 작가는 "나는 여러모로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인데, 기이하게도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영화를 보는 나의 시선에 대해 말하다 보면 내가 약간의 비장미를 간직한 슬픈 인간이라고 느끼게 된다"라고 서술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자신은 에세이보다 소설에서 솔직한 이야기를 쓸 수 있다고 고백한다.
난 바로 이때 '엇, 지금 내가 하고 있던 생각인데 바로 글로 나와버리네'라고 생각했다. 작가 역시 자신의 글이 에세이를 기대하고 읽는 독자에게는 꽤 비장하게 읽힘을 인지하고 이렇게 썼구나. 그는 독자의 생각에 '미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에세이를 덮지 않고 계속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팀 페리스의 '타이탄의 도구들'을 읽고 있는데 비슷한 생각이 담긴 구절을 발견했다. 이 책은 수백 명의 성공한 거물(타이탄)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습관 등을 분석한 자기 계발서이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32838895&start=pnaver_02
이 책 내용 중 뉴욕타임스 기자이자 책 '더 게임', '더 트루스' 저자의 닐 스트라우스를 소개하며 그의 글쓰기 법칙을 소개하는 챕터를 읽는 중이었다. 그에게는 세 가지 법칙이 있다고 한다.
첫째, 나를 위해 쓴다. 둘째, 팬들을 위해 쓴다. 셋째, 안티들을 위해 쓴다.
안티들을 위해 쓴다는 말은 곧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비판하고 깎아내리려고 조롱할 것인가?'에 대해 쓴다는 설명이다.
닐은 특히 마지막 단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
"나는 항상 래퍼 에미넴을 본보기로 삼는다. 사람들은 절대 에미넴을 욕할 수 없다. 그는 미리 스스로 지은 노랫말로 자신을 욕하고 답하기 때문이다. 좋은 글은 타인을 설득하지 않는다. 비판받을 만한 곳에 미리 가 있을 줄 아는 작가가 성공한다."
비판받을 만한 곳에 미리 가 있을 줄 아는 작가가 성공한다. 이는 곧 메타인지가 잘 되는 작가, 동시에 자신의 치부나 부끄러울만한 부분을 잘 드러내는 작가가 성공한다는 말이었다.
내가 최근 다시 박완서를 읽다가 완전히 빠져버려 잠을 줄이며 읽은 이유도 같다. 박완서의 작품은 중고등학생 때 거의 다 읽었었는데 그때는 이런 재미를 잘 몰랐다. 내가 최근 읽은 박완서의 에세이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에서 박완서는 읽는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드러낸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3871551&start=pnaver_02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의 한 단편에서 박완서는 거지를 만난 이야기를 쓴다.
그날도 나는 빗속의 거지 앞에서 핸드백을 열려다 말고 이 거지 뒤에 숨어있을 번들번들 기름진 왕초 거지를 생각했고, 앉은뱅이도 트릭이란 생각을 했고, 빗물이 콸콸 흐르는 보도 위에 저렇게 질펀히 앉았는 것도 일종의 쇼란 생각을 했고, 그까짓 몇 푼 보태주는 것으로 자기 위안을 삼는 것 외에도, 대체 무엇을 해결할 수 있나를 생각했다. (...)
그리고 그 예비지식 때문에 나는 거지조차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내 눈으로 확인한 그의 비참조차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속아만 산 사람처럼, 정치가의 말을 믿지 않던 버릇으로, 세무쟁이를 믿지 않던 버릇으로, 외판원을 믿지 않던 버릇으로, 장사꾼을 믿지 않던 버릇으로 거지조차 못 믿었던 것이다. (...) 믿지 못하는 게 무식보다도 더 큰 죄악이 아닌가도 싶다.
그 외에도 이 단편 모음에는 자신이 원하는 '보통의 사위'에 대한 환상을 직시하고 자신에 대해 "가장 겸손한 척 가장 욕심 없는 척 이렇게 말했지만 실은 얼마나 큰 욕심을 부렸었는지 모른다. 욕심 안부린다는 말처럼 앙큼한 위선은 없다는 것도 내 경험으로 알 것 같다"라고 고백하기도 한다.
또 다른 단편에서는 지인들과 함께 놀러 간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고 화를 낸 사건에 대해 쓴다. 지인들이 노래하는 것을 강요하자 박완서는 노래하지 않을 자유를 운운하며 버럭 화를 냈다고 한다.
나는 나의 유치함에 치가 떨여 어쩔 줄을 몰랐다. 그 고약한 기분은 다음 날까지 계속됐다. 7,80년대를 끽소리 한마디 못하고 살아남은 주제에 고작 노래방에서 웬 자유씩이나. 그 생각만 하면 창피하고 혐오스러워 닭살이 돋을 것 같았다.
박완서의 인간다움에, 그리고 나 역시 자주 하는 '더러운 생각'들을 이토록 깨끗하게 풀어낸 것에 대해 놀랐다. '저 정도 작가도 이런 생각들을 하는 건 마찬가지구나'라는 안도감(?)도 들었다. 이러한 구절들 때문에 그의 에세이를 계속해서 읽게 됐다.
'타이탄의 도구들'에서 팀 페리스가 만난 작가 파울로 코엘료는 이렇게 말했다.
글쓰기는 지성과 교양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다. 글쓰기는 내 가슴과 영혼을 보여주면서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것이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대단해 보이는 작자들도 나같이 평범한 사람과 비슷한 실수를 저지른다고, 혹은 쓸데없이 비장해지기도 한다고, 혹은 '이불킥'할만한 꼬장을 부리기도 한다고. 우리는 작가의 글을 읽으며 이런 것들을 다시 확인하고 싶어 하는 걸 것이다.
다시 한번, 비판받을 만한 곳에 미리 가 있을 줄 아는 작가가 성공한다는 말을 되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