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과 방패의 싸움에서 칼이 이기는 이유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은 내 생일 두 달 전부터 생일날에 맞춰 도쿄여행을 가자며 도쿄 여행 유튜브에 빠져 살았다.
누굴 위한 생일 선물인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 생일날 딱히 할 것도 없었고 생일날이 되면 복직도 한 달 남짓 남았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여행을 다녀오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남편은 여행 계획 짜는 것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나는 여행 계획이나 동선은 신경 쓰지 않고, 돌아기가 도쿄에서 아프지 않고 잘 돌아올 수 있는 것만 집중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돌 아기, 정확히는 13개월 아기와 도쿄여행 4박 5일을 다녀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막상 도쿄에 가서는 좋은 일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가기 전까지 굴곡이 있었다.
출발 D-3
아기들이 짜고 이러는 건지, 인터넷을 보니 아기들이 여행 가기 직전 아픈 것은 거의 '국룰'이었다.
4월 말까지 감기를 앓다가 5월부터는 컨디션이 회복되어 무리 없이 여행을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건만, 떠나기 4일 전부터 아기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특히 5월은 휴일이 너무 많아서 어린이집에 가지 않고 가정보육을 하는 날이 많았는데, 그러면서 나의 피곤함 레벨이 점점 쌓여가고 있었다. 게다가 남편이 대구에 1박2일로 친구를 만나러 가면서 이틀 연속 혼자 아기를 보고, 주말과 연휴가 겹쳐 가정보육이 길어지던 때였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장염에 걸려 집안일과 육아를 하지 못했다. 길어진 가정보육으로 안 그래도 심신이 지쳐있는데 남편은 골골거리고 여행 준비를 나 혼자 하게 생기자 점점 심술이 났다.
남편이 누워있는 걸 참기 괴로워 아기를 데리고 잠깐 산책을 다녀왔는데 하필이면 찬바람이 불었다. 빠르게 근처 슈퍼 안으로 들어가 바람을 피했지만 슈퍼를 오며 가며 10여분 정도 찬바람을 맡은 아기는 결국..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출발 D-2
남편은 장염에 걸려있고 아기는 감기에 걸려있었다.
도쿄 4박 5일.. 가는 게 맞을까?
나의 마음은 이때부터 '취소'에 기울어졌다. 인터넷을 보니 아기의 컨디션이 여행 직전 급격히 안 좋아져 취소를 했다는 썰들이 난무했다.
남편은 "어차피 취소 3일 전이 지났으니, 지금 취소하나 출발 1시간 직전에 취소하나 환불받을 수 있는 가격은 똑같다"며 하루만 더 경과를 보자고 했다.
웬만하면 병원에 가지 않는 남편은 오전에 병원에 다녀오고, 하루종일 음식은 물론이고 물도 마시지 않았다. 포카리스웨트나 물 정도는 먹어도 된다는 내 말에 "아냐, 아무것도 안 먹어야 빨리 낫는대"라며 정말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물 한잔도 안 마시고 회사에 다녀온 남편을 보면서 독기가 느껴졌다.
이날도 역시 아기는 열이 났다. 38도 초반 정도였는데 해열제를 먹이니 금방 열이 내리긴 했고 먹거나 노는 것에는 문제가 없는 컨디션이긴 했다.
일단 소아과에 가서 상태를 보기로 했다. 의사는 너무나 단호하게 "안 가시는 게 맞습니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감기이지만 운이 안 좋아 폐렴이나 중이염으로 번질 수도 있다는 의견이었다.
남편에게 그대로 전달했지만 남편은 계속 "하루만 더 상태를 봐 보자"는 입장을 반복했다.
출발 D-1
남편은 이틀 동안 음식도, 물도 먹지 않고 회사를 다녀왔다. 아기가 아프니 취소를 해야 한다는 나의 짜증까지 받으면서 회사일까지 하고 온 것이다.
'여행에 미친 남자인가..?'
슬슬 남편의 독기가 무서워지면서 도저히 취소를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보다는 아기 상태가 나아진 것 같았지만 약간의 미열이 남아있었다. 어제 갔던 소아과에 다시 가서 4박 5일의 상비약을 지어달라고 했다.
의사는 "안 가시는 게 맞는데, 어머님의 선택이시니 어쩔 수 없이 약은 지어드리겠다"라고 답했다. 나를 한심하고 고집스러운 어머니로 보는 것 같은 시선에 나도 공감이 갔다. "저의 선택이 아니라 남편의 선택인데요!!"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더 한심한 것 같아서 그냥 조용히 있었다.
일단 상비약을 받고 아기를 위한 짐을 쌌다. 혹시 모르니 숙소 근처 일본 소아과도 알아보고, 파파고로 번역을 하면서 일본 소아과를 방문한 블로그의 후기들도 찾아보았다. 우리나라 소아과는 몇천원 수준의 진료비를 받지만 일본 소아과를 가면 7~8만원을 내야한다고. 그래, 아프면 내야지 별 수 있나.
그러나 보통 아기들이 감기로 열이 나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약을 주는 것 외에는 큰 다른 점이 없으니 웬만하면 상비약을 주면서 버텨보자고 생각했다.
남편은 이틀간 아무것도 안 먹더니 장염이 나아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반 포기 상태였다. 우선 가서 아기가 아프지 않도록 약과 짐들을 꼼꼼히 챙겼다.
출발 D-1 저녁
아기의 열이 내려가는 듯 내려가지 않았다. 나는 이제는 여행을 취소해야 할 타이밍이라고 확신했다.
남편에게 "하루만 더 경과를 보자며! 지금 상태가 어제랑 비슷한데 왜 취소를 안 해?"라고 폭발했다.
남편은 "지금 취소하나 1시간 전에 취소하나 똑같으니깐..."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너무 화가 난 나는 "아니 생일 선물이고 뭐고 그냥 취소하라고!! 아니, 생일 선물로 여행 취소해 줘!!"라고 거의 발을 구르면서 말했다.
남편은 역시 잠결에 핸드폰을 만지작 거렸다.
나는 '드디어 취소를 하려는 건가'생각하면서 피곤함에 쓰러져 잠에 들었다.
출발 당일
새벽 6시가 됐다. 남편은 이틀을 굶었더니 컨디션이 완전히 좋아졌다며 여행 짐을 체크했다. 나에게도 어서 씻으라고 채근했다.
'어제의 그 만지작 거림이 취소의 만지작 거림이 아니었구나...'
이제 나는 거의 반 득도의 상태였다. 이 남자에게 여행을 취소하게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샤워를 해야 했다. 샤워를 하면서 생각했다.
'칼과 방패의 싸움에서는 칼이 이긴다. 칼은 무언갈 추진하려는 강력한 의욕이 있다. 방패는 무언가를 막으려고 하는 의욕을 가지고 있다. 무언갈 추진하려는 의욕은 무언갈 막으려는 의욕보다 강하다. 방패인 나는 칼을 막을 수 없다.'
여행에 미친 남자를 말리다 지친 나는 득도를 한 상태로 중얼거렸다.
이번 경험으로 인해 '칼과 방패의 싸움에선 누가 이기나'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었으니 나름대로 소득이 있는 거라고 합리화했다. 나중에 구글 같은 곳에서 이런 면접 문제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 혼자 저 수수께끼를 풀 수 있다고.
아기의 컨디션을 체크해 봤다. 다행히 아기의 열은 떨어져 있었다.
어쨌든 상비약을 지어놨으니 4일 만에 큰 병에 걸리지는 않겠지, 혹시나 상태가 나빠지면 일본 소아과를 가고, 나라도 아기를 데리고 빨리 귀국해야지 라면서 나를 다독였다.
그렇게 3일째 굶고 있는 남편과, 돌이 갓 지난 아기를 데리고 우리는 도쿄로 떠났다.
나는 속으로 '여행에 미치다'라는 카페가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니구나.. 여행에 미친 사람이 생각보다 많구나..'라면서 3일째 굶고 있으면서 여행을 간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남편을 관찰했다.
그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고 마치 '굶으면 더 건강해져요'라고 광고하는 단식 전도사처럼 보일 정도였다.
결론적으로 아기와 남편은 일본에 가서 정말 쌩쌩하게 컨디션을 회복했고, 남편은 여행 내내 "것봐!! 취소했으면 이 좋은 곳을 못 왔겠지??"라면서 의기양양해했다. 나는 컨디션을 회복한 아기에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아기는 집에서 어린이집에 가던 때보다 훨씬 더 건강해졌다.
나 빼고 우리 집 이 씨 두 명은 'E씨'가 분명하다고 다시 한번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