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겟팅이 된 소감
나 역시 오랜만에 영화관에 가서 보고 싶어진 멜로물이었다. '만약에 우리'의 흥행 요인을 분석하는 기사를 쓰면서 '입소문'을 언급했는데 나 역시 내가 속한 단톡방에서 '08학번이라면 이건 봐라'라는 강력한 추천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실 넷플릭스 등 OTT로 인해 한편에 14000원이 된 영화를 보러가는 일은, '꼭 영화관에서 봐야할 작품'을 선별하게 했다. 그 가운데 이러한 멜로영화는 '꼭 영화관에서 봐야할 작품'의 리스트에 들지않는 게 보통이다.
'영화관에서 봐야할 작품'은 아바타 시리즈나 듄 시리즈 처럼 대작이거나, 아니면 가족과 함께 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아이와 함께라면 많은 부모들은 오프라인으로 나온다. 그렇기에 2025년 한국 영화계에서 반짝 희망을 보여줬던 게 '주토피아2'와 '아바타: 불과 재'이다.
그러나 이런 위기 속에서도 주목할 만한 흐름은 있다. 작은 규모의 영화들이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관객과 접점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판단이다. 지난해에도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 연상호의 '얼굴' 등이 보여준 이 흐름은 꾸준히 이어져 올 것이라 예상됐다.
영화 '국보'가 20만 관객을 돌파했고, 연상호의 '얼굴'은 넷플릭스 공개 직후 글로벌 1위에 올랐다. 그리고 흥행이 어려웠던 멜로 장르의 '만약에 우리'(김도영 연출)가 200만 관객을 넘기며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해당 기사를 썼을 때는 120만이었는데 거의 2주 만에 80만 관객이 들어섰다.)
'만약에 우리'는 명확한 타깃을 설정했고 그들의 정서를 건드리는데 성공했다. 넷플릭스가 수년 전부터 강조해온 전략 중 하나가 "당신의 취향이 무엇인지 모르지만(그만큼 시청자의 취향이 다양하다는 뜻), 우리가 제공하는 다양한 콘텐츠 중 하나는 분명 당신을 위한 것"이라는 메시지가 있었다. 이런 전략적 변화는 소소하지만 명확한 취향을 가진 이들을 타깃한 콘텐츠들의 등장을 촉진했다. '만약에 우리' 역시 대규모 자본이나 화려한 마케팅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교한 타깃팅과 정서적 정확성으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만약에 우리'는 전형적 청춘 멜로지만 동시에 치밀하게 설계된 '세대 서사'다. '08학번'이라는 구체적 시공간을 전면에 내세운 이 영화는 현재 30대 중후반에서 40대 초반, 즉 '88만원 세대'라는 담론 속에서 청춘을 보낸 세대를 정확히 호명한다. 아이리버 MP3, 싸이월드 BGM으로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던 감성의 풍경들. 최근 싸이월드의 종료를 아쉬워했던 바로 그 감성까지 포착한다.
사실 이 영화를 보고 '헛, 나 정확히 타겟되었구나'(08학번임)라는 생각이 들면서 굉장히 씁쓸해졌다. 이제 나도 '당신이 젊었을 때 느낌을 느껴보세요, 그리고 돈을 쓰세요~'라는, 그 세대가 되었구나. 추억을 느끼고 돈을 내주는 세대가 되었구나 하는 기분. 한편으로는 그정도로 추억할 만한 문화가 있고 소비를 할 수 있는 세대가 되었구나 싶었다.
영화는 꿈이 컸던 청년기와 어느정도 현실에 안착한 3040의 시간을 교차로 배치한다. 게임 개발자를 꿈꾸지만 취업에 실패한 은호(구교환)는 겨우 들어간 작은 회사에서조차 특유의 반골 기질을 숨기지 못해 멱살을 잡힌다. 건축사를 꿈꾸던 정원(문가영)은 모델하우스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간다.
원룸에서 시작한 두 사람의 삶은 점차 반지하로 내려간다. 게임 동아리에서 함께 공모전을 준비하기로 했던 친구는 은호에게 "학점도 중요하잖아"라며 그의 꿈을 비현실적 이상으로 치부한다. 알고보니 그 친구는 '금수저'로 한강이 보이는 집에 살고 있었다. 은호는 괜히 "한강 풍경을 맨날 보면 우울해진다던데" 씰룩댄다.
영화 초중반부의 전개는 익숙한 멜로의 문법을 따라 유치함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구교환 특유의 찌질하면서도 애처로운 매력과 문가영의 현실감 있는 연기가 이야기를 단단하게 받쳐준다.
쉽게 와닿는 연출도 장점이다. 햇볕이 '딱 한 줌'만 들어오는 정원의 고시원. 정원이 깨진 연애를 이야기하며 신세 한탄을 하자 은호는 자신의 방 커튼을 활짝 열어 햇볕을 들인다. 마치 자신만이 그녀에게 많은 햇볕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이후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고, 취업 실패 후 게임에만 몰두하던 은호는 정원이 햇볕을 받기 위해 열어둔 커튼을 획 닫아버린다. 더 이상 그녀에게 빛을 줄 수 없다는 선언. 이 장면은 어떤 대사보다 두 사람의 관계 변화를 보여준다.
원룸에서 반지하로 이사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원했던 건 금수저 친구의 '한강뷰 아파트'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원룸에서 우연히 주워 온 1인용 소파를 놓고 살아가는 소박함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사 가야 했던 반지하 방에는 그 소파조차 들어가지 않는다. 이 장면은 청춘이 꿈꿨던 평범한 '최소한의 삶'조차 지키기 어렵고, 그 삶의 조건에서 사랑은 사치같이 느낄 수밖에 없던 때를 보여준다. 또한 이 삶 안에서 상대를 붙잡고 있는 것이 상대에게 피해를 준다는 열패감과 그 열패감에 낮아진 자존감까지 샅샅이 비춘다.
영화 후반부, 이미 아이가 있는 은호는 정원에게 수많은 '만약에'를 쏟아낸다. 만약 우리가 반지하로 가지 않았다면, 만약 네가 나를 기다려줬다면, 만약 마지막 날 내가 너를 따라 지하철을 탔다면. 정원은 "그랬다면 너와 영원히 함께였을 것"이라고 말하다가도, 이내 "우리가 서로를 놓친 건 정말 잘한 선택이야"라고 답한다.
영화는 쉽게 '라라랜드'나 '건축학 개론'을 떠올리게 한다.
다만 꿈을 위해 사랑을 포기해야 했다는 씁쓸함만으로 결론을 내진 않는다. 정원은 은호에게 "같이 꿈을 꿨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고 말한다. 함께 꿈꾸었던 시간 자체를 삶의 일부로 인정한다. 여기서 "내 이야기 같다"는 공감이 터져 나온다. '만약에 우리'를 선택한 관객들은 자신의 시간을 통과한 이야기에 공감을 보낸다. 그리고 입소문으로 확장된다. '만약에 우리'는 정확한 타깃에 명확하게 닿았기 때문에 선택됐다.
*이 글은 미디어오늘 <침체된 영화판, 관객은 왜 '만약에 우리'를 골랐나> 기사로 먼저 발행되었으며, 이후 개인적 감상 등을 더해 작성했습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06/00001337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