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찬우 Aug 21. 2020

오늘 밤, 그래 자라나라 생각 생각

퇴근 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생각에 잠이 오질 않아

어제는 11시에 집을 나서서 21시까지 지도교수님과 미팅을 하다가 22시가 다 되어서야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몸은 너무 힘들어서 발 뒤꿈치도 들기 힘들다. 아기들처럼 발을 땅과 수평으로 내리꽂으니 걸을 때마다 푹, 푹, 소리가 났다. 그 와중에 머릿속에서는 미팅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리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오찬우란 존재 참 대단하다 싶다가도, 아이고 내가 또 부질없는 생각 한다 싶다.


'나 좀 대단한데?'싶어서 둘러보면 그냥 다들 이렇게 살고 있고 심지어 더 열정적으로 살고 있다. 어른이 되어 얻은 가장 큰 성과는 내가 별 것 아닌 놈, 대단할 것 없는 사람임을 진심으로 깨달은 거다. '나란 놈, 내가 살아온 길 딱히 대단하지 않다'라는 생각은 나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것 같은데, 요상하게 나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하던 일을 무던히 계속해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 그래 까짓 거, 칭찬이 필요할 땐 또 칭찬해주면 되지. 그렇게 20대 중반부터는 제 논에 물 대듯 살고 있다.



점심도 저녁을 먹지 못하고 이온음료로 버텼기에 뭐라도 좀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식당 문 연 곳은 딱히 없고 편의점 도시락은 왠지 싫고 해서 아직 불 밝혀져있는 도넛 가게 들어갔다. 고르기도 귀찮다. 알아서 잘 팔리는 걸로 담아줬겠거니 그냥 포장되어있는 걸 골랐다. 막상 집에 가서 도넛 상자를 열었지만 참내 헛웃음이 나온다. 직경이 새끼손가락만 한 도넛을 보면서 부피 대비 기름에 닿는 면적은 늘어났으니 큰 도넛보다 더 맛있긴 하겠다고 생각한다. 또 또 머리 쓴다 또.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제습기에 써큘레이터까지 틀어서 온도와 습도 조절을 다 했는데도 잠이 안 온다. 11시에 누웠다가 15분 단위로 깨는 것을 반복하고 잠들기를 포기했다. 침대 머리맡에서 좋은 팔베개가 되어주던 총균쇠를 펼쳐 읽는데도 책장이 꽤 넘어가는 걸 보면 오늘 잠자기는 그른 게 확실하다.



교수님과 긴 회의를 하면서 내내 긴장하고 있어서 회복하는 데 오래 걸리는 것 같다.

내가 교수님과 대화를 하면서 가장 신경 쓰는 게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가장'을 붙일 수 있는 부분이 없다. 나는 모든 점에 촉각을 곤두세우고서 8시간을 정자세로 앉아 머리를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굴리고, 선행연구에서 공부한 내용을 이야기하고, 예의 바르게 그러나 궁금한 점은 명확하게 전달되도록 질문하려고 하였고, 교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펜을 쥔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오른손에 볼펜을 쥐고 있으면 왼손은 형광펜을 쥐고 대기하고 있는 식이다.


교수님과 미팅을 하고 집에 오는 길에는 늘 집까지 조금 돌아오더라도 환승이 없는 차를 탄다. 그리고 눈을 감거나 멍하니 밖을 보면서 미팅에서 있었던 일을 영상을 돌려보듯 여러 상황까지 시간 순으로 떠올려본다. 이때 '아, 이렇게 말을 했어야 하는데.', '이걸 놓쳤었네' 하면서 반성의 시간을 가진다. 때론 가면서 그 내용을 폰 메모장에 정리한다. 집에 도착해서는 손으로 갈겨쓴 내용을 다른 사람도 알아보기 쉽게 잘 정리한다. 그리고 이번주 회의 내용의 핵심은 무엇이고, 다음주 회의까지 해야 할 일을 정리해서 다음날 오전까지 교수님과 공유하면 교수님과의 논문 미팅이 비로소 끝이 난다. 그러고 나서는 다음 미팅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쓰고 보니 정말 신경을 곤두세우고서 작업을 하는구나 싶은데, 그냥 나의 성향이고 습관이어서 잘 고쳐지지도 않는다. 몸은 여기저기가 아프고 힘이 없는데 생각은 멈추질 않으니, 움직이진 못해도 할 건 다 하고 떠나는 식물이 된 것 같다.


식물의 특징엔 이동성이 없다는 것도 있지만, 생활사가 계속 순환한다는 점도 있다. 꽃이 있던 자리에 열매가 열리고 그곳에서 씨앗이 나오고, 땅에 떨어진 씨앗이 움터 다시 꽃이 되고 열매가 되는 것이다. 꽃 하나 입장에서 보면 난 이미 죽었는데? 싶겠지만 '같은 종' 입장에서 보면 삶과 죽음이 순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이 모두 같은 속도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어서, 양지바른 곳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조금 빨리 싹을 틔우고 꽃이 되고 열매를 맺고 그늘에서 자란 아이들은 이들보다 꽃도 열매도 느리게 핀다.


나의 생각들은 꽃밭에서 각자 다른 양의 볕을 쬐며 자라고 있는 꽃나무인가 보다. 그래 계속 생각해라, 자라나라 생각 생각!

너무 긴장하고 집중한 데다, 미팅했던 내용이나 그 장면이 계속 생각나는 탓에 장시간 미팅 후엔 잠이 잘 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뭐 어쩌겠나. 오늘은 양지바른 곳에 앉은 생각각자 죽음을 향해 혹은 새 삶을 향해 비틀비틀 삐죽빼죽거리나 보다 해야지. 남으로 창을 낸 집에 살면서도 왜 잠을 못 자냐건  그냥 웃어야지 어쩌겠나. *



*중학교 때인가 고등학교 때 배운 김상용 시인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를 좋아한다. '왜 사냐건 웃지요'라는 마지막 구절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다.

**표지 그림은 오지호 작가의 <남향집>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가져왔다.





작가의 이전글 오늘, "올림픽 정신으로 시험 응시"의 참뜻을 깨쳤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