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잘 마시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왠지 오늘따라 맥주가 너무너무 마시고 싶었다. 가까운 미래가 결정돼도 걱정이 끊이지 않는 걸 보니 중2병, 대2병처럼 뭐 하나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우리 집 근처 편의점 사장님은 내가 어느 날 학교 로고가 적힌 티셔츠를 대충 걸쳐 입고 간 걸 보시고 자신의 딸도 그 학교를 나왔다며 반가워하셨다. 말씀을 들어보니 따님이 나와 같은 학부 선배님이셨고, 그래서인지 내가 특히 밤샘 공부를 위해 커피, 에너지 드링크, 젤리 등을 사러 갈 때마다 열심히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며 과자, 땅콩 등 주전부리를 하나씩 손에 들려주시곤 하셨다.
사실 석사 졸업하고 3개월은 책 읽고 영화 보고 글만 쓰며 쉴 생각이었다. 그러나 코로나로 경제 상황이 어렵고 자영업자인 부모님의 수입은 일정치가 않은 편이며, 돈 잘 버는 오빠에게 손을 벌리기는 싫었다. 그렇게 우애 상할 바에는 뭐라도 해서 내 생활비를 버는 게 맞다.
나는 가족들이 모두 화목하려면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적당한 사회적 성공을 이루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내가 우리 가족 중 제일 나이가 어리기는 하지만, 남들보다 경제활동을 늦게 시작해서 부모님께 도움을 많이 받은 것도 사실이다. 또, 오빠는 장학금 받고 돈 벌어가며 공부하는 공대생이었기 때문에 부모님께 학비 지원을 덜 받았다. 분명 그에게 가지 않은 돈의 일부가 나에게 돌아왔으리라.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나는 엄마, 아빠, 오빠의 도움을 받고 자란 것이다. 결정적으로,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걸 수도 있지만, 배로 갚아줄 수 없는 경제적 도움은 받지 않는 게 가족 간 화목을 지키는 일임을 굳게 믿는다. 바로 갚아주지는 못할 망정 받는 건 좀 덜 해야 한다.
나는 사범대 일반대학원 석사 졸업 후, 현장에서 교사를 하며 교육경험을 쌓을 계획을 세워뒀었다. 1월 1일, 엑셀에 1월에 서울과 경기도교육청에서 공고를 낸 학교 모두를 원서마감 순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순서대로 원서를 꾸려 두 군데에 접수 한 뒤, 1월 7일에는 여섯 개 학교에 지원서를 내기 위해 서류를 꾸려두었다. 그러던 중 7일 오전에 봤던 학교 면접에서 합격통보를 받았고, 계약서를 쓰고 가라는 말에 개인정보 일체를 넘겨주고 왔다.
나는 알고 있다. 계약서를 썼어도 아직 계약기간이 시작한 것은 아니고, 무를 방법이 있다는 것을. 그러나 일찍 찾아온 휴식이 좋았다. 그래서 상도덕(?)을 지킨답시며 원서를 더 이상 내지 않았다.
"너는 도전 정신이 부족해. 그냥 쉬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다른 곳도 지원은 해 봐야지! 거기가 1 지망은 아니었잖아."
엄마의 핵심을 관통하는 한 마디가 침대에 엎드려 걱정만 거듭하면서 초조하게 책장을 넘기는 날 얼어붙게 했다. 너무 맞는 말이라서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다른 곳에 원서를 낼 자신도 없었다. 어차피 내도 떨어질 거라는 마음, 그저 책 읽고 영화 보고 원두별로 커피맛을 음미하며 몇 주만 보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어떻게 보면 귀찮음이고 어떻게 보면 지금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잘 파악했다고 볼 수 있다.
내 결정에 걱정을 표하는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지 못하고, 그들이 나의 선택에 두는 훈수에 괜히 신경 쓰느라 복잡한 마음에 맥주를 한 캔 들이켜기로 했다. 면접 당일 물과 휴지를 사러 아침부터 편의점에 들렀던 걸 사장님께서 기억하시고 면접 결과를 물어보셨다. 운 좋게 빨리 붙었지만 안주하고 싶은 마음에 더 이상 원서를 쓰지 않았고 부모님께 잔소리를 들었노라 주절거렸다.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겠다. 그런데 사장님께서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우리 딸도 참 열심히 공부했는데 늘 일이 잘 풀리진 않더라고. 경력을 쌓는 게 중요한가 봐 요샌. 좀 쉬고 싶으면 붙어 놨으니까 그거 잘하고 그 경력 발판 삼아 다음에 더 나은 데 가면 되고. 아유 아무튼 축하해요."
나는 어쩌면 수고했고 이젠 쉬어도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감사하다며 연신 꾸벅거리는데 유통기한이 한참 남은 디저트 하나를 손에 쥐어주셨다. 케이크에 맥주라 아주 제대로 된 휴식 템이다. 감사한 마음으로 이젠 1월은 바라던 대로 마음껏 쉬기로 결심해본다. 그리고 조금 늦은 새해 목표를 하나 세웠다. "얇은 귀 두툼하게 만들기".
이제 쓸데없이 걱정하거나 주눅 들거나 나의 휴식에 방해되는 걱정은 접어두고, 사람들의 축하를 기쁘고 감사함 마음으로 받으면서 새 학기를 준비하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학술적 글이 아닌 글을 원 없이 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