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들에게
사랑하는 아들아. 아이가 철없는 소리를 해도 부모가 웃으며 감싸주는 것, 기다려주는 것은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나중에는 부모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 때문이란다.
아이는 어느 날 문득 내가 부모와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자기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이는 우쭐해 하지만 곧 모든 결정을 현명하게 처리할 순 없다는 현실과 부딪힌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아가고 실패하며, 자신이 바라는 모습과 현실의 차이를 인식하고 좌절하는 과정을 거친다.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는 그 모습을 가슴 아파하며 보듬어 주고 인내한다. 마침내 아이가 부모를 대신할 만큼 성숙했다면 부모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부모를 밀어내고 자기가 부모와 같다는 말을 할까? 아니라 생각한다. 아마도 어른이 된 아이는 부모의 사랑에 한 없는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품을 거야.
너와 나에 대한 이야기, 아빠와 아빠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로만 들렸다면 잠시 숨을 고르고, 자! 한 발짝 더 나아가 보자.
인간이 진리를 깨쳐가는 과정과 인간을 낳고 길러 마침내 인간을 완성하는 천지 부모의 관계는 한 인간의 삶의 여정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단다. 요즘 소파에서 뒹구는 네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단다. ‘지루해.’ 그렇겠지. 요즘 같은 때, 맘대로 나가 놀지도 못하고. 재미있는 무언가, 새로운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이란 걸 알아. 그런데 만약 어른이 된 네가 이런 말을 하고 있다면, 그건 조금 다른 의미를 품고 있을 거라 짐작한다.
삶의 의미를 찾고 싶다.
내가 해야 하고 하는 일의 의미를 알고 싶다.
지금 내 고통의 이유와 나아갈 바를 알고 싶다.
이런 의미 말이야.
고통은 희망이 들어오는 틈새라는 명언이 있다. 섣부른 깨우침은 이제 막 싹을 틔운 앙상한 새싹과 같아. 봄여름이란 비바람을 견뎌내는 성숙의 시간이 필요해. 잎을 풍성이 벌려나갈 경험이 필요해.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기까지, 자신이 되고 싶은 자신의 모습이 되기까지.
일에 있어서도, 지식에 있어서도, 진리를 찾는 구도의 여정 가운데에서도 깨침의 순간을 맞게 될 때, 너의 깨침에는 깨우침의 내용과 범위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교만하면 깨침이 너의 성장에 발목을 잡는 올가미가 될 것이고, 겸손하면 깨어진 틈을 비집고 나와 저 너머로 나아갈 거야. 알았다하는 순간, 환희에 찬 그 순간, 알았다는 마음부터 얼른 던져 버려라.
너에게 지루한 시간은 나에겐 인내의 시간이란다. 아마 하느님이 우리를 바라보는 마음도 같지 않을까? 아빠도 너를 한 없이 인내한다. 사랑이란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