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사랑하는 법, 둘
아들아,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냈니? 네가 어른이 된 때에도 아빠는 지금처럼 "오늘은 무슨 일 있었니? 친구들과는 어떤 일이 있었니?"라고 물을까? 섭섭하지만 아마도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 직장 때문에 멀리 타지에서 혼자 생활할지도 모르니 대화가 줄어들 것 같고, 그게 아니라도 사내는 나이가 들수록 자기 이야기가 적어지는 경향이 있으니 말이다. 아빠가 자주 이렇게 묻는 건 정말 네가 어떻게 보냈는지 궁금해서이기도 하고 말이다, 사실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단다.
일신우일신이란 말이 있다. 상나라를 세운 탕 임금은 세수하는 대야에 이 말을 적어두었다고 한다. 매일 아침 혹은 저녁에 세수를 하며 '나는 어제의 나보다 더 나아졌는가.' 이렇게 자문했으니 당연히 훌륭한 임금이 되었지 않았을까? 너의 하루가 날마다 새로운 하루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네게 일기쓰기를 권한다.
군 복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나? 하루는 할머니께서 내게 아주 오래된 공책 묶음을 내주시더구나. 바로 어렸을 때 썼던 나의 일기장이었단다. 교과서나 묵은 책을 정리하시다가도 일기만큼은 한 권도 버리지 않고 모아두셨다고 하셨다.
꼼꼼히 다시 읽어보니 드문드문 기억이 나는 것도 있었지만, 대개는 기억이 나질 않았단다. 내가 그때 이런 생각을 했었나, 이런 고민을 했었구나. 믿어지니? 아빠는 사춘기가 초등학교 4학년 때에 왔더구나. 네가 날 닮았다면 이제 몇 년 후면 사춘기에 접어들 텐데, 아빤 어떻게 하니. 웃자고 한 얘기다.
여하튼 마치 전혀 모르는 어떤 아이가 쓴 글을 보고 있는 듯했다. 기억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지금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생각과 기억을 끄집어내 쭉 펼쳐놓아 보면, 아마 대개는 요 며칠 상간의 일일 거야. 기억이란 넓고 깊은 바다에 떠다니다가 오감이 불러일으키는 향수의 그물에 잡혀 건져 올려지는 부표 같은 것일 거야. 그래서 말이야. 아들아, 날마다 불어오는 망상의 바람에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네게 일기쓰기를 권한다.
사람의 인생은 한 권의 책이다
그렇다면 그 책의 초고는 일기일 수밖에 없다. 세상에 많은 작가들이 글을 쓰지만, 수천 권의 책을 낸다손 치더라도 그 사람을 표현하는 작은 조각일 뿐이다. 누군가가 읽어주길 바라는 글은 자신을 온전히 드러내기 어렵단다. 사람은 저마다 감추고 싶은 허물이 있고, 꾸미고 드러내고 싶어 하는 일에는 말이 덪붙게 마련이다. 남이 읽어주길 바라는 글은 형식도 중요하고, 친절해야 하지. 생각이 건너뛰거나, 논리에 맞지 않으면 읽는 사람이 불편하단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애쓰다 보면 글 쓰는 것이 무척 힘든 노동이 된다. 일기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 오직 너 자신과 나누는 솔직한 대화이기만 하면 된다.
일기는 자신과 하는 대화
내가 처음 쓴 일기는 학교에서 내준 숙제였다. 매일 써야 했고, 다음날 선생님은 '참 잘했어요'라는 도장을 찍어주셨어. 간혹 선생님 생각도 적어주셨지. 일기라고 하지만 누군가 읽고 검사를 하는 글이었지. 진짜 일기라고는 할 수 없다만 그래도 습관을 길러주는 점에서 좋은 숙제였다 생각해. 아빠가 '오늘 하루는 어땠니'하고 물어보는 이유는 여기 있다. 그렇게라도 하루를 되새김질해보게 말이다. 진짜 일기는 숙제가 아니니까. 매일 쓰지 않아도 되고, 하루에 여러 번 써도 괜찮다. 누군가 읽길 바라는 글이 되어선 안되고, 자신과 솔직한 대화이면 돼. 그러면 자연히 일기는 너를 위로해주고, 고민을 해결해주는 좋은 친구가 되고, 상담자가 되어 줄 거다. 물론 아빠는 네 일기장을 보고 싶은 유혹이 있겠지만, 참을게. 네 얼굴이 어두운 날이면 더 궁금하겠지만, 대화로 이유를 찾아볼게. 그러나 아빠 말을 너무 믿진 마라. 네가 힘들어할 때, 아빤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구나. 숨기는 건 네 몫이다. 잘 감추렴.
일기는 시대를 담는 기록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은 10년쯤 되었다. 결혼을 하고 네가 태어나고 그럴 때쯤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 일기는 단지 쓰고 마는 것이 아니야. 적어도 그 10년 동안의 내 생각과 내 생각을 만들었던 사건들을 되새김질할 수 있다. 그때의 주변 일과 세상의 이슈에 대해서 나름의 해석과 생각을 적은 곳이 꽤 있더구나. 일기는 너의 기록인 동시에 네가 살아가는 시대의 기록이기도 하다. 일기를 그림처럼 쓰렴. 형식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지만 기억을 잃어버린 뒤에 미래의 널 위해서.
익숙함을 경계하는 방법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할 때 방심이 비집고 들어오는 법이다. 아빠의 직업인 방송연출가는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수십수백 가지 단계마다 각기 다른 성격의 사람들과 함께 협업하는 일이다. 대개 사고가 나는 경우는 모르는 일보다는 잘 알고 있고 익숙한 일에서 생기더구나. 왜 그럴까. 방심 때문이다. 이 문제는 다음에 다시 주제를 정해 이야기 나눠보자꾸나. 다만 날마다 하루를 되돌아본다면 익숙함이 가져오는 방심을 경계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마음이란 망아지와 같아서 내버려 두면 방만해지기 십상이란다. 매 순간 오감에 휘둘리고 식견에 휘둘리는 마음의 고삐를 잡는 것을 경敬이라고 한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위태로운 마음에서 너의 지극히 선한 마음으로 옮겨가는 시간이 될 거야. 일기를 쓰는 건 그 마음의 행적을 글로 옮기는 과정이란다. 일일신우일신, 날마다 나를 새롭게 해서 익숙함을 경계해라.
아들아, 일기를 쓰거라. 아마 내 일기에는 너희들을 사랑한다는 말이 제일 많을 거다.
그렇다고 아빠 일기를 훔쳐보기는 없기.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