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날의 식사>
몇 해 전 체중계에 올랐다가 기겁하고 내려온 적이 있었다. 7킬로가 찐 거였다. 느낌이 오긴 했었다. 지난 두어 달 눈뜨고 있으면 항상 무언가가 먹고 싶었기에 살이 찌려나 했었다. 1킬로 또 1킬로 야금야금 찌더니 어느새 7킬로라니. 바지가 안 맞고 몸이 무거워지는 큰 변화였다. 다이어트를 해야겠다 싶어 이것저것 알아보다 친구에게 자연식물식을 소개받고 찾아보았다. 최대한 가공하지 않은 자연에 가까운 재료를 먹는다는 설명과 화면 가득 야채와 과일의 사진들이 주르륵 이어졌다. 야채와 과일을 좋아하니 어려울 게 없어 보였다. 함께 도전해 보기로 하고 마트에 가 야채와 과일을 가득 사 왔다. 그리고 당장 다음날 첫끼니부터 낯선 경험과 만났다.
언뜻 보면 채식과 비슷해 보이지만 자연식물식의 큰 특징은 가공하지 않은 상태의 재료를 먹는다는 것이다. 야채도 조미료를 넣고 볶는 게 아니라 ‘생’으로 먹는 것. 가지나 애호박을 어떻게 생으로 먹을 것인가? 그러면 찌개와 국은 엄청난 가공을 거친 음식이었으며 햄이나 만두는 절대 안 되는 가공식품인 것이다. 순간 헉 소리가 나오면서도 슬금슬금 오기가 끓어올랐다. 일단 해보자. 초보임을 감안하여 약간의 페널티를 허용하며 시작하기로 했다.
나와 내 친구의 밥상을 소개한다.
잡곡밥을 하고 조미 안된 구운 김에 파프리카를 싸 먹는다. 버섯이나 애호박은 물에 익혀 조미 없이 먹었다. 한 끼 정도는 바나나한송이(한 개가 아니라 주렁주렁 한송이)와 과일로 대체했다. 나의 밥상은, 내 친구의 밥상은 나날이 단출해졌지만 난이도는 올라갔다. 무얼 먹고 싶은지가 아닌 먹을 수 있는 것을 찾는 경험은 충격적일 만큼 낯설었다. 이제껏 살며 이렇게 한 끼의 메뉴를 고민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몇십 년간의 식사 습관을 버리고 나니 난생처음 혼자 밥을 차려먹는 사람이 된 것처럼 바로 다음끼니를 고민해야 했다. 좋아하던 국과 찌개를 포기하고 물로 목을 축였다. 맵고 짠맛에 너무 목이 말라 강한 맛이 나는 쌈채소들을 사 오기 시작했다. 항상 부엌에 자리 잡고 있던 컵라면, 냉동만두를 빼고 배달앱을 지우자 그건 그저 식단의 변화가 아니라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한 세상의 달라짐을 뜻했다.
며칠이 지나자 포만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배부르게 먹었음에도 배가 불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원래 위장을 채우던 가공식품과 육류가 사라지자 뇌는 혼란에 빠진듯했다. 며칠이 더 지나자 냄새와 맛에 민감해졌다.
성급히 씹어 넘겨 조미료와 향신료로 기억되던 맛들이 재료 본연의 맛으로 새롭게 해석되어 입력되었다. 양파는 시고 달고 매서웠고 적채는 씁쓰름한데 달큼하고 얼얼했다. 점차 버섯의 쿰쿰함이 사랑스러워졌고 당근의 풋풋한 흙내가 반가웠다. 나는 먹을거리를 사냥하러 나서는 사람처럼 점점 더 능숙하게 사냥인 듯 수렵채집인듯한 먹거리 구하기에 익숙해져 갔다. 후각이나 미각의 변화와는 달리 몸무게는 그대로라 답답하던 마음도 잊고 낯설고 궁금해지는 맛의 세상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서너 달의 시간이 더 흐르고 낯선 세상에서의 식사는 갑작스러운 변화로 그만두게 되었다. 잠시 엄마와 지내게 되면서 부엌의 주도권을 넘겨야 했기 때문이다. 그 쯤 몸이 가벼워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자연식물식을 그만두고 이후 차곡차곡 살이 빠져 두세 달 후 예전 몸으로 돌아갔다. 자연식물식은 체중감소에 영향을 미친 걸까? 아무 소용없는 미친 도전이었고 그저 엄마밥을 먹고 빠진 걸까?
답을 알아내고자 내 생활을 살펴봤다.
당시 내 생활의 큰 변화중 하나는 고질병이던 불면증이 좋아진 것이었다. 잠자리에 들 때 속이 적당히 비어있으면 다른 날보다 푹 잘 수 있었다. 그렇게 푹 자고 일어나면 배가 불러도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또 다른 변화는 식사에 대한 나의 자신감이었다. 이전 나의 식탁은 순간순간의 식탐해소와 이후 나쁜 음식을 먹었으니 탄수화물이나 지방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나쁜 음식을 원하는 나는 나에게 제지당했고 맛있는 걸 먹어도 죄책감을 느꼈었다 식사가 본연의 기능을 잃고 감정적이었다.
자연식물식을 하며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배불리 먹었고 식사의 범주에 들지 않던 한 그릇도 식사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나의 식탁이 넓어진 것이다.
나를 불안하게 만든 건 특정한 음식이 아니었구나. 그러자 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음식을 바라보는 시선과 살찐 나를 바라보는 나였다. 조금만 살이 쪄도 자신 없고 옹송그려 있었다. 내 눈엔 10배는 못생겨 보였고 옷태가 안나는 촌스런 몸뚱이를 가진 사람이 되곤 했다.
나는 이전처럼 살찐 나에게 매몰차지 않기로 했다. 아침마다 몸무게를 재던 습관을 버렸다. 어젯밤과 오늘아침의 몸무게 차이는 거의 없다. 영점 몇 킬로의 차이로 감정의 울렁임을 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지금 00킬로에서 00킬로 사이의 구간을 살고 있으리라 추정하고 살이 찐 것처럼 언젠가 다시 빠질 것이라 느긋하게 생각했다. 딱 떨어지지 않는 숫자의 구간이 사람을 얼마나 평온하게 하는지 알게 되자 체중계를 처분하고 일 년에 한 번 건강검진표에서의 수치로 건강적 도움을 구했다. 쪘던 살이 빠졌지만 정확한 몸무게는 모르게 되었고, 그 뒤 끊임없는 체중변화는 있었지만 불안하지 않으려 나를 다독였다.
몸무게가 늘었음을 느끼면 나를 차근차근 살핀다. 요즘 몇 시에 자고 일어나는지 푹 자고 있는지, 일상적인 동선 속에서 걷거나 움직임이 줄지 않았는지, 물을 충분히 마시고 있는지, 햇살아래 얼마나 걷고 있는지. 그렇게 화분처럼 나를 살핀다. 작은 화분에 피어나는 한두 송이 꽃은 여러 가지 세심한 보살핌의 결과다. 물도 주기적으로 햇살도 듬뿍 줬는데 화분이 시들시들해서 걱정하던 어느 식집사는 환기를 자주 시켜주고 바람의 소중함도 깨달았다고 한다.
물을 많이 마시고 영양제를 먹고 동선을 바꾼다. 운동화를 신고 모자를 쓴 나는 햇볕을 쪼이며 시장에 장을 보러 간다. 불어난 체중이 하룻밤사이에 빠질 수 없다. 내일의 나도 비슷한 몸무게일 테니 나를 나무라지도, 배고프지 않은데 계속 먹게 두지도 않는다. 바람이 햇살이 물이 필요한 화분처럼 자연식물식에서 배운 대로 식재료를 본연의 맛을 입이 익히게 하고 엄마의 밥상이 가르쳐준 제철음식을 먹는다.
음식은 단순히 먹는 것 , 과식하면 살찌게 하는 것, 나쁜 음식은 지정되어 있는 것이란 생각의 틀을 깨고 나니 나를 살찌운 것도 다시 빠지게 한 것도 어느 하나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음식은 힘든 하루의 보상이 되기도 살찌게 하고 건강을 해치는 불안이 되기도 한다. 때로 우리가 음식에게 주는 가치가 너무 크고 무겁다. 그러다 보니 먹는 일이 생각보다 많은 불안과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배고파서 먹는 맛있는 한 끼. 감정적이고 불안한 날엔 음식을 순수하게 한 끼로 대하기로 해본다. 너무 과한 즐거움도 살찌게 할 불안거리도 아닌 그저 한 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