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 씁씁한 밥상>
지금보다 코로나가 더 큰 미지의 공포였을 때 세상은 하나씩 문을 닫아갔다. 우리는 멀어져야 했고 급작스레 혼자임에 능숙한 성숙한 개체가 되어야 했다. 특히 나는 더 그랬다. 백신 미접종자에겐 식당도 카페도 심지어 도서관도 넘어설 수 없는 문이었다. 직장에 양해를 구하고 외식을 자제했다. 소수의 사람들과만 식사를 했고 갈수록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줄어들자 거의 대부분의 식사를 혼자 하게 되었다. 혼자 하는 식사는 외롭게 보인다거나 하는 감상적인 이미지가 크지만, 실상 외식 없이는 요리라는 가사노동이거나 배달이라는 선택의 바다에 빠지는 현실이었다. 처음 얼마간은 편식이 심한 나만을 위한 메뉴를 요리조리 시키며 타인에 대한 배려 없는 식사를 즐겼다. 그러다 기본적인 식사의 틀마저도 깨지고 컵라면이나 과자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그렇게 내 입맛은 단맛 짠맛 매운맛 사이를 도돌이표처럼 돌다 이상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먹고 싶은 게 있는데 무슨 음식인지 알 수 없는 거였다. 달콤한 음식이 먹고 싶은데 케이크가 아니었고 매콤한 게 먹고 싶은데 떡볶이나 불닭소스의 매운맛이 아니었다. 이 메뉴 저 메뉴를 찾아보아도 끌리는 게 없었고 배를 곯지는 않았지만 먹어도 배가 고픈듯한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자기가 먹고 싶은 걸 모르다니 세상 바보가 된 거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뉴스에선 백신 접종률이 80%를 돌파했다고 했다. 2차 3차 백신을 빨리 접종하라며 조만간 미접종자들은 마트 출입이 제한된다는 말이 이어졌다. 코로나전 몸이 안 좋아 주사요법을 받았던 나는 전신에 이상반응을 보이며 치료법 없는 고통의 시간을 보냈었다. 일반적인 처방이었고 내가 동의했기에 누구를 원망하지 못했고 의학적 인과관계도 밝혀낼 수가 없었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나의 몸이 알 수 없는 통증으로 들끓는 건 정말 낯설고 무서운 경험이었다. 겨우 회복한 뒤론 다시 어떤 주사도 백신도 맞을 자신을 잃은 채 그렇게 헐벗은 기분으로 코로나시대를 맞이했었다.
기사를 본 난 비장하게 에코백을 메고 집을 나섰다. 갑작스레 찾아왔던 통증, 전염병, 알 수 없게 변한 내 입맛. 나를 괴롭힌 건 많았지만 그쯤 나를 가장 지치게 했던 건 미접종자라는 이름표였다. 때때로 난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이가 되었고 겁이 많은 이가 되었다가 조직에서 혼자 튀어나온 모난 돌이 되기도 했다. 나의 불행도 나의 사정도 전염병 앞에선 그저 변명일 뿐이었다. 백신을 맞지 않아도 밥을 혼자 먹어도 괜찮다는 것을 세상에 입증해야 할 것 만 같았다. 그렇게 간 마트 안, 끝없는 식재료의 바다에서 이리저리 떠밀리던 나는 한 매대 앞에서 중심을 잡았다. 야채코너 한 구석에서 꽈리고추 한 봉지를 보았을 때였다. 푹익은 야채의 달콤함과 고추의 매콤함 그리고 여운을 남기는 씁쓸한 끝맛. 꽈리고추찜! 내가 찾아왔던 바로 그 맛이었다.
씻어둔 꽈리고추와 밀가루를 비닐봉지에 함께 넣고 흔들어 밀가루 옷을 입혔다. 중탕한 찜기에 고추를 찌는 동안 양념장을 만들었다. 이것저것 사온 재료를 썰고 다져 넣어 휘휘 저어 두었다. 찜기 속의 고추가 알맞게 익을 타이밍을 몰라 자꾸 뚜껑을 열어보고, 한입 먹어볼 때마다 너무 달고 너무 짜지는 양념장에 손이 바빠지고 마음은 그보다 더 바빠졌다. 마침내 숨이 죽은 고추들을 꺼내어 양념장을 그 위에 살살 뿌리며 섞은 후 통깨까지 뿌려주고 식탁을 바라보았다. 햇반하나 고추찜 그리고 계란프라이. 많은 에너지를 퍼부은 식탁은 단출해서 허무하기까지 했다.
힘 빠진 손으로 한입 먹어보았다. 맛있었다. 나름 차르르 윤기 나는 고추 위에 잘 입혀진 양념장이 짭짤하니 입맛을 돌게 했다. 생각보다 잘했네. 으쓱했다. 밥 한 숟가락을 먹고 다시 고추찜을 하나 입에 넣어보았다. 생생한 밀가루맛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퉤퉤거렸다. 분명 달았는데 다음엔 너무 매워지고 뭉근하게 씹히더니 한 곳에 뭉친 양념장은 짠맛 테러를 퍼부었다. 그렇게 나는 계속 성공과 실패를 맛보았다. 희망과 절망을 맛보았다. 하지만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니 이상한 개운함이 찾아왔다.
그래 원래 이런 거였어! 세상은! 근사하다가 망한 것 같다가 다시 예뻐 보이고 그런 거. 멀쩡하던 곳이 이유 없이 아프다가 또 이유 없이 나았듯, 내가 잘못하지 않아도 무언가가 망쳐질 수도 있는 거였다. 뜻밖의 행운만큼 뜻밖의 불행도 희소성 있게 세상에 존재하고 있고 그걸 내가 선택할 수는 없는 거였다. 내 앞의 행운과 불행을 모르듯 나는 나의 몸도 입맛도 모를 수 있고 다시 이렇게 알아갈 수도 있는 거구나. 덜렁 놓인 세 개의 빈 그릇이 든든했다. 뿌듯했다.
고백하자면 그 이후로 꽈리고추찜에 자주 도전하진 못했다. 귀차니즘 초보에겐 성가신 음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 차린 단출한 밥상의 교훈은 진했다. 먹고 싶은 음식을 찾는 것은 단순한 입맛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몸이 뻐근할 때 으슬으슬할 때 아픈 어깨를 두드리고 기운을 살피듯, 음식의 이름이 아닌 내 몸이 원하는 맛을 살피는 것. 그건 나의 소리를 듣고 몸도 마음도 보살피는 것이었다. 어설픈 몸짓이어도 반쯤 망친 요리라도 그렇게 하는 건 세상에 더 꿋꿋히 서려는 몸짓이었다. 언제가 내 몫으로 떨어지는 불운에 맞서는 몸짓이었다. 다음에 나에게 어떤 일이 닥쳐와 잔뜩 웅크려 들었다가도 다시 일어나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을 그 밥상이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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