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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오후 Oct 20. 2023

오랜만의 인사

<뜨거운 화해의 음식>

명절을 보내고 돌아온 나의 짐 꾸러미 한구석에서 작은 주머니가 발견됐다. 곰돌이가 그려진 귀여운 양말은 불룩했고  끝은 빨간색 리본이 매어 단단히 봉해져 있었다. 만져보니 오돌토돌 알갱이가 움직이며 파도소리 같은 소리를 냈다. 이게 도대체 뭐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구건조증엔 온열찜질이 최고라며 엄마가 손수 제작한 눈찜질안대였다. 전자레인지에 1분 돌려 따끈해지면 눈 위에 얹고 있으란다. 잠도 솔솔 올 거라고. 알았다고 잘 쓰겠다고 말했지만 전자레인지 1분은 생각보다 귀찮았고 그렇게 곰돌이 주머니는 내방 한귀퉁에서 잊혀져갔다.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온열찜찔을 절대 할 수 없는 계절을 거치며 나는 세상의 풍파에 거세게 흔들리다 다시 겨울을 맞았다. 누우면 이런저런 생각이 잠이 오지 않는 날이 늘었고 오지 않는 잠은 나를 더 불안하게 했다. 마치 내일의 내가 몹시도 피곤해 닥쳐올 그날의 시련에 더 취약해질 거라는 강한 예감 같은 것들. 눈을 감고 있어도 조용해지지 않는 밤들이었다. 문득 협탁을 뒤지다 곰돌이 주머니를 찾았다. 전자레인지 앞에서 1분을 기다리면서도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30초가 지나자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고소하고 따듯한 냄새. 달지 않은 무언가를 달달 볶아 평소엔 보여주지 않던 깊은 속 따뜻하고 다정한 속살이 나오도록 하는 것  같은 냄새. 1분이 되어 꺼내 들자 포근한 공기가 온몸을 덮쳤다. 침대로 돌아가 눈 위에 얹었다. 약간 뜨거운가 싶더니 곧 적당한 온도로 식어갔다. 무언가를 햇볕에 바짝 말리면 근심도 사라지는듯한  해와 바람의 냄새였다. 포슬포슬하게 바짝 말려진 수건이나 베갯잇, 이불 같은 것들을 떠올리다 잠이 들었다. 다음날 생각보다 말끔하게 일어난 나는 그날분의 시련과 스트레스에 잘 맞서다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음날 저녁엔 결국 리본을 풀어보았다. 콩일 거라는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붉그스름한 팥이 한가득했다. 아!!! 내가 싫어하는 대표적인 음식들이 생각났다. 팥죽, 팥빙수. 사람들과 어울려 팥빙수를 마지못해 몇 숟가락 떠먹을 때 외엔 팥이 들어간 음식은 먹지 않았고 특히 팥죽은 정말이지 싫어하는 음식이었다. 평생 절대 먹지 않을 것을 맹세라도 한 것처럼 거부하며 살아왔었다. 눈 위에서 풍겨 나오는 따듯한 냄새를 맡으며 어린 시절 기억을 여기저기 들추어보았다. 온 식구가 모여 커다란 냄비에 한가득 끓여진 팥죽을 열심히 먹고 있는 어린 내가 있었다 뜨거워서 한참을 호호 불다 한 숟가락 먹고 잽싸게 물을 마시고 그걸 반복하며 열심히 먹었었다. 그럼 언제부터, 왜 나는 팥죽을 싫어하게 된 걸까? 기억을 뒤적이다 잠이 들었다.



팥죽을 싫어하게 된 기억은 어느 날 주머니를 데우던 중에 불현듯 떠올랐다. 어렸던 어느 날부터 팥죽이 식탁에 나오는 횟수가 줄었었다. 어느 날 오랜만에 나온 팥죽은 너무 달았다. 뜨거워진 혀가 강한 단맛에 아려왔었다. 내가 알던 맛있던 팥죽의 단맛이 파괴되는 느낌이었다. 엄마가 바빠졌던 어느 날부터였다. 집에 가면 끓여져 있는 국을 덥혀 혼자 앉아 찬밥을 말아먹고 학원에 갔다. 다녀와도 해가지지 않아 엄마를 기다리던 날들이 많았다. 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천 원짜리를 가지고 과자를 사 먹기도 하고 골목길을 헤매고 놀 아이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그네도 타고 이웃집 개가 낳은 강아지 구경도 다녀왔지만 아무리 해도 텅 빈 집에서의 시간을 메우는 건 힘들었던 날들이었다.

엄마의 관심을 잃은 팥죽과 나는 곧 평정을 잃었다. 달달했던 세상은 밸런스가 무너져 너무 달거나 밍숭맹송 해졌다. 새알심이 없던 날엔 세상이 너무 어두웠고 팥죽은 온통 붉그죽죽 하기만 해 입맛이 없었다. 난 감정기복이 심해져 투정이 늘고 눈물도 늘었었다. 누군가의 정성과 온기를 잃은 음식이 사실은 가장 좋아했던 음식이었다면, 싫어지는 것도 금방이었다. 그저 불이 켜진 집에서 엄마가 달그럭 거리며 따듯한 무언가를 만드는 걸 보고 싶던 어린 마음은 그렇게 매정하게 돌아 섰다. 팥죽은 그렇게 내 기억 속에서 맛없고 외로운 음식이 되었고 나이가 들어가며 그냥 싫은 음식으로 남았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한 어느 날 새로 주머니를 만들어주겠다는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이번엔 다른 곡물로 해주겠다고 했지만 난 팥을 넣어달라고 했다. ‘너 팥죽 싫어하잖아 그런데 괜찮았어? “  엄마의 물음에 잠시 멈칫했다. 곧 ’ 이젠 좋아 ‘라고만 말했다. 그 시절의 엄마는 언제나 바빴고 쫓기듯 한 달 한 달을 살았다. 아빠는 다른 지역으로  떠나 홀로 돈을 벌고 자식 둘을 먹이던 나날들.

빨리 그리고 많이 만들어야 했기에 엄마가 선택할 수 있는 메뉴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팥죽이 사라졌고 식혜가 사라졌고 조려야 하고 우려내야 하는 음식들이 사라졌다. 우리 집의 식탁은 그렇게 달라졌었다.



며칠이 지나 택배가 왔다. 용기에 담긴 매실액 사이 비닐포장된 꽃무늬 찜질기가 보였다. 만져본다. 쓸어본다. 싸라락 쓰르륵 파도소리가 마음을 가라앉혔다. 소화가 잘 안 되는 나를 위해  언제부턴가 매실액을 만들고 매실 장아찌를 담가 보내준다. 괜찮으니 안 보내도 된다고 말하지만 그것들을 보며 다행이다 싶기도 한다. 엄마가 더 이상  몸을 혹사하며 일하지 않아도 되어. 하루 긴 낮을 심심할 수 있게 되어 좋았다. 여유 있어진 엄마의 시간이 다시 나에게로 흐른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찜질기를 눈에 올리고 누워있던 밤들에 난 깨달았다. 엄마의 시간은 계속 나에게로 흐르고 있었다고.

고달프고 절박하고 치사한 시간을 겪어가며 진즉 나는 이해하고 있었는데 ….. 세상에 피곤해질 때 맘대로 되는 게 없을 때 그 무엇이라도 근원적인 무엇의 결핍을 탓해보고 싶었던 거였다.

엄마가 봄날에 핀 꽃을 많이 봤으면 좋겠다. 따분해하다 살포시 낮잠이 들었으면 좋겠다. 그러다 눈을 떠 보니 아직도 오후 4시면 좋겠다. 그렇게 이제 할머니가 된 엄마의 하루하루가 평온하길. 그저 우리의 지금이 평안하기를.  팥을 싫어하는 딸의 입맛은 그저 변덕이라고 생각하길.

그날밤 나는 세상 따듯한 시간을 보냈다. 팥을 싫어하던 마음만큼의 원망과 미움이 줄어 더 따듯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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