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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오후 Oct 20. 2023

그 매력의 정체

<이름 없는 정성을 만날때>

한 카페가 있었다. 그곳엔 양면 통창에 보이는 하늘이 그림 같았고 다른 한 면의 서가엔 책과 화분들이 도란도란 놓여있어 눈이 편안했다. 바닥에 놓인 큰 액자에는 드로잉이나 사진작품이 감각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중앙 공간엔 테이블이 네다섯 개가 있었지만 그곳을 채우는 건 가구라기보다는 음악이었다. 남은 한 면을 차지하는 스피커를 통해 제법 크게 울리지만 이상하게 시끄럽지 않은 음악. 귀에 흔하지도 않아 귀를 기울이게 하는 그런 음악들이었다. 



메뉴판은 단출했다. 커피 종류 몇 가지와 차종류 몇 가지. 메뉴판의 여백이 클 정도로 단순한 메뉴구성에서 신중함과 집중력이 묻어났다. 몇 안 되는 메뉴를 한참 들여다보고는 라떼를 시키고 앉았다. 나의 고심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준 까만 옷의 바리스타는 계산 후 카드를 돌려주며 말없이 목례를 했다. 자리에 앉아 그 공간의 모든 걸 보고 들이마시며 숨을 골랐다. 그는 서두르지는 않지만 게으름 없는 단정한 동작으로 에스프레소를 추출했다. 소리가 맛있었다. 우유를 따르고 스팀을 낼 때도 그의 동작은 바르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한잔의 커피가 완성될 때까지 내가 경험해 왔던 것보다 긴 시간이 걸렸지만 지루하거나 조바심이 일지 않았다. 기대를 부르는 기다림이었다. 마침내 완성된 커피는 쟁반 없이 바리스타의 손에 의해 내 앞에 놓였다. 우유거품이 딱 잔끝까지 닿아있었지만 걸어오는 동안 한 방울도 흐르지 않을 정도로 폼이 쫀쫀했다. 같이 내어준 미온수를 마시고 커피를 마셨다. 순간 확 느껴진 캐러멜향과 맛에 내가 시럽을 넣어달라고 했었나 생각했지만 과일향이 느껴지는 산미가 곧 뒤를 이었다. 그날의 원두를 알 수 없었지만 원두가 뿜어내는 맛을 충실하게 음료로 재현해 낸 것 같았다.

한 모금을 마시고 창 밖을 바라봤다. 바로 노트북을 꺼내 작업을 하고 싶지 않았다. 입안에서 사라지는 다양한 맛을 음미하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한 모금 마시고 음악을 들었다. 눈에 이어 귀로 다시 커피를 음미하고 싶었다. 그렇게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커피만 마셨다. 속이 들끓던 피곤한 하루가 덩달아 조용해졌다. 한 모금 마시고 가만가만 커피잔을 바라보고 테이블 무늬도 바라보았다. 머릿속 많았던 잡념들이 잦아들었다. 커피잔이 바닥을 보일 때까지 그저 커피만 마신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하나로도 충분한 것들


한동안은 그저 마음에 드는 카페여서라고 생각했다. 음악도 커피도 조명도 내 취향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조용히 혼자 숨을 고르고 싶을 때, 잘 안 풀리는 일이 있을 때, 쉬고 싶을 때 그 카페에 가고 싶은 이유가. 하지만 그 매력의 정체는 어느 날 갑자기 깨달음으로 발견되었다.

항상 뜨거운 커피는 미온수와 함께 서빙되었는데 어느 날의 나는 좀 더웠었다. 얼음물을 부탁하니 까만 옷의 바리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음물로 더위를 물리치고 따듯한 커피를 마셨던 그날 이후로 계절은 점차 차가워져 갔고, 이따금 방문할 때면 얼음은 점점 수가 줄어 마지막엔 딱 한 조각만이 물 잔에 떠 있었다. 나는 그 한 조각의 얼음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건 이제껏 살아오며 겪은 가장 섬세한 얼음이었다.

내가 경험한 수많은 커피를 떠올려보았다.  너무 유명한 음료인 커피는 일종의 대명사가 됐다. 아침에 에너지 드링크처럼 점심식사 후엔 습관으로 피곤한 순간엔 나를 깨우는 음료로 커피는 다양한 역할을 한다. 그러자 사람들은 오히려 커피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카페인의 효과나 어떤 커피를 좋아하는지의 기호를 떠나 커피는 우리 몸에 들어가 흡수되는 한잔의 차이고 한잔의 음식이다. 커피의 맛은 쓰거나 고소하다는 한두 단어로만 설명될 수 없다. 때로는 짜고 달고 시다. 잘 볶은 원두로 잘 내린 에스프레소에선 수많은 맛이 담긴다. 정성스레 재료를 다듬고 씻고 육수를 우려내고 보글보글 지글지글 요리해 내듯, 커피도 누군가의 손에선 그저 패스트드링크로 누군가의 손에선 많은 걸 담은 정성스러운 한 그릇의 음식일 수 있다. 그런 음식과 함께 제공되는 그곳의 물은 얼음 한 조각마저도 정성스러웠다.



이제껏 누군가의 정성을 마주쳤던 순간을 기억해 보았다.  묵묵히 자신의 뜻대로 나아가던 사람들의 모습은 주저앉을 것 같은 나를 일으켜 세우곤 했다. 자신을 향한 약속을 지켜내려는  소리 없는 꾸준함과 노력은 ‘힘내' ’ 너는 할 수 있어'와 같은 힘없는 위로의 말을 제압하는 강한 감동이었다.

그게 불특정 다수를 위한 정성스러운 노동이라면 그건 서비스정신이 아니라 스스로를 갈고닦는 수련의 과정이 된다. 신념과 철학을 만드는 음식에 담아야 하고 습관이 돼버릴지 모르는 영혼 없는 몸짓을 경계해야 하므로. 누군가의 정성을 먹고 마시는 건 그런 귀한 매력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그 카페가 사라지고도 난 많은 커피를 마셨지만, 음악도 화분도 창가의 햇살마저도 모든 게 한잔의 커피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줬던 그때의 매력을 아직 다신 만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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