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고 있던 걸 놓자, 선명해졌다

헝가리-부다페스트, 낯선 시작

by 지썬

비행기에서 오래 잤다.

기내식은 세 번. 내릴 즈음엔 온몸이 무겁고 둔했다.


공항도, 택시도, 창밖의 풍경도 낯설었다.

그런데 그 낯섦이 이상하게 편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이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가벼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물 한 잔 마시고,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마치 그 도시를 오래 살아본 사람처럼

아무 계획 없이 길을 나섰다.


부다페스트는 조용했다.

느린 바람, 오래된 건물, 흩날리는 먼지.

낯선 거리인데도 불안함이 없었다.

어쩐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곳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는 게

두렵기보단 상쾌했다.

지금 이 순간, 어디든 내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것.

그 자유가 묘하게 들뜨게 만들었다.


세체니 다리를 건넜다.

바람이 강물 위를 스치고,

도시는 조용히 노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차시 성당을 지나 어부의 요새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앉아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있지만 조용했고, 조용하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그 틈에 나도 앉았다.

가만히 강가를 바라보았고,

온 마을이 노을빛으로 번져있었다.



혼자 여행할 때 가장 곤란한 건 사진이다.

누군가에게 부탁할 수도 있지만,

마음에 드는 사진을 건지기란 쉽지 않다.

결국 가장 나다웠던 순간은,

정작 내가 찍을 수 없다는 사실이 늘 아쉬웠다.


그래서 이번엔 스냅 촬영을 신청해 두었다.

어부의 요새 앞에서 만난 다른 여행자와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젤라또를 허겁지겁 먹으며

스냅시간에 쫓겨 기다렸다.


하지만 약속시간인 6시가 지나도

작가는 오지 않았다.

연락도, 응답도 없었다.


‘사기인가?’

머릿속이 그렇게 반응했다.

사이트를 뒤지고, 로밍 안 되는 상태에서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sns용 전화를 걸었다.


그때 한국은 새벽 1시.

다행히 친구는 깨어 있었고, 너무 고맙게도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주었다.


“정말 죄송해요. 자느라 스케줄을 깜빡했어요. 지금 가도 될까요?”


솔직히 하루를 비워뒀기에,

당장 이것 말고는 일정이 없는 나에게

지금이라도 온다는 말이 감사했다.


작가는 도착했고,

중간에 커피도 사주었다.

화를 내지 않는 나를 보며

오히려 더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화내지 않았다. 착해서라기보다,

여행 중 누군가로 인해 내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 덕분인지, 30분 촬영 예정이었지만 테슬라 차를 타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2시간 넘게 촬영 투어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민 이야기부터 인생의 방향성까지

꽤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말한 한 문장이 오래 남았다.


“원숭이를 잡으려면
땅에 구멍을 파고 사과를 넣어요.
원숭이는 사과를 쥐지만,
손을 빼려면 그걸 놔야 하죠.
인생도 그래요.
무언가를 쥐면, 다른 걸 내려놔야 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내가 쥐고 있는 것들, 놓지 못하는 것들.

여행은,

어쩌면 그런 걸 들여다보게 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익숙한 일상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내 모습들이,

낯선 도시에서는 오히려 선명해졌다.


손에 쥐고 있던 걸 놓자.

도시는 조용히 가까워졌다.

나는 그제야,

이 여행에 들어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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