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의 낮과 밤
이른 아침, 세체니 온천으로 향했다.
사람이 많기 전에, 조금 더 깨끗한 물에서 천천히 쉬고 싶었다.
트램 환승을 어디서 해야 할지 몰라 멈춰 서 있던 순간, 눈에 띈 한 헝가리 여성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현지인과 자연스럽게 말을 트는 방법이 생긴다.
길을 물어보는 것, 그리고 예쁘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 옷이든, 미소든, 액세서리든—그 짧은 칭찬 하나로
서로의 마음이 훅 열릴 때가 있다.복잡하게 접근할 필요 없이, 그냥 내가 좋다고 느낀 걸 말하다 보면, 그게 가장 쉬운 친해지기 방식이었다.
그녀는 흔쾌히 나를 온천까지 데려다주었고, 도착한 세체니 온천은 상상 이상이었다.
날씨는 선선했고, 온천은 따뜻했지만, 색은 시원했다.
대부분의 온천은 온도가 먼저 떠오르는데,
세체니 온천은 색이 먼저 기억에 남을 정도로 쨍한 색감이 강렬했다. 민트색 온천에 몸을 담그며, 고개를 들면 파란 하늘이 겹쳐 들어왔고, 사방이 노란 건물로 둘러싸여 있었다. 햇빛을 머금은 그 노랑은 유난히 눈부셨다.
예전에 요시고 전시회에서 봤던 사진이 떠올랐고,
그 작품 안에 들어간 것 같았다.
이게 휴가구나. 그 생각이 들었다.
햇빛은 생각보다 강해서 모자와 선크림이 절실했다.
피부가 탔지만 그것도 여행의 일부였다.
온천을 다 끝내고, 머리는 젖어 있었지만, 걷는 사이 금세 말랐다.
돌아가는 길, 어디선가 반죽 굽는 냄새가 났고, 발걸음을 멈춰 굴뚝빵 하나를 샀다.
한국에선 수영장에서 츄러스를 사 먹곤 했는데,
부다페스트에선 온천 후 굴뚝빵을 먹고 있다는게 좋았다. 아주 단순하게.
아무 일도 아닌 일들이 순식간에 하루가 되어 있었다.
동행을 구해 도착한 식당엔, 이미 먼저 와 있는 두 명의 한국인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아, 메뉴를 고르고 있었다. 그때, 한 한국인이 식당 앞을 지나갔다.
우리와 눈이 마주쳤고, 그는 가볍게 손을 흔들며 웃었다. 우리도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맞은편 동행이 갑자기 말했다.
“어? 저분 유도선수 금메달리스트인데?”
네이버에 검색해 보니 진짜였고, 아, 그분은 우리가 알아본 줄 알고 인사하신 거구나.
갑자기 셋 다 웃음이 터졌다. 뻔뻔하게 찾아가서 사진을 부탁했다. 그분도 흔쾌히 웃으며 함께 찍어주셨다.
뜻밖의 에피소드. 그런 게 하루의 마지막에 들어오면 이상하게 그 하루가 기억에서 더 선명해진다.
부다페스트의 야경은 충분했다.
국회의사당은 금빛으로 물들었고, 다뉴브강엔 그 빛이 그대로 흘렀다.
그렇게 야경을 끝까지 보고 나니,
내 하루는 이미 꽉 찼고, 솔직히 너무 피곤했고 졸렸다.
지금 당장 숙소에 들어가눕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직장인은 휴가를 길게 낼 수 없다. 다음을 기약하는 건, 말 그대로 기약이 없다는 뜻이다.
지금 아니면 못 할 것들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지 모르니까.
며칠 안 되는 휴가를 느슨하게 흘려보내기엔 아쉬웠기때문에. 피곤하더라도 뽕을 뽑아야 한다는, 집념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헝가리는 펍 문화로 유명하다기에
눈꺼풀은 무거웠지만, 결국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서로를 모르는 사람들이 낯선 나라의 펍에서 말을 트는 건 생각보다 자연스러웠다.
펍에서 만난 한 명은 나와 동갑이며 같은 일을 하다가 몇 달 전 퇴사하고, 지금은 한인민박 사업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익숙한 삶을 내려놓고,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는 용기.
여행중 만난 이들은 정말 다양했다.
누군가는 지금 하는 일이 자기 길이라며 묵묵히 걷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이건 아닌 것 같다”는 확신에 과감히 새로운일을 전혀 시작하고 있었다
그 다양한 이들 사이에서 나는, 어느 쪽에도 닿지 못한 채 어딘가에 서 있었다.
확신도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머물 자신도 없었다.
그저 멈춰선 채로 있는 건, 나 자신을 더 힘들게 할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이 엉키는 와중, 이제 진짜 더 있으면 기절할 것 같았다. 몸 전체에 쌓인 감정이 버틸 만큼 다 찬 느낌이었다. 눈이 반쯤 감긴 상태로, 오스트리아에서 보자는 짧은 작별 인사를 건네고서 조용히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엔 두 명의 어린 친구가 앉아 있었다.
스티커를 고르며 실컷 웃던 아이들.
그러다 그중 하나가 “이거 가질래?” 하고 말을 걸었다.
고양이 스티커 한 장을 건넸다. 갑작스러운 선물에 당황했지만 고맙다고 말했다. 그렇게 받은 작은 고양이 스티커 한 장을 핸드폰 뒷면에 붙였다. 조금은 피곤한 하루의 끝에 받은 선물처럼.
버스 창밖으로는 도시의 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는 숙소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말 그대로 기절했다.
하루를 다 쓰고 난 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