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바키아, 무계획이 주는 또 다른 여행
그 어떤 계획도 필요 없는 하루,
단지 ‘지금’을 만끽하는 것이 전부인 날.
특별한 걸 하지 않아도, 충분히 좋았던 여행이었다.
슬로바키아_브라티슬라바에서
처음 여행 계획을 짤 때, 슬로바키아는 없었다.
동유럽 3개국, 헝가리, 오스트리아, 체코. 딱 그 세 나라만 생각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비엔나에서의 여유가 예상보다 길어졌고, 그 여유 끝엔 아주 살짝의 지루함이 있었다.
‘한 시간밖에 안 걸린다’는 단순한 이유로 나는 기차표를 예매했고, 정확히는 계획 없는 하루를 기꺼이 만들어보기로 했다.
기차에 몸을 실은 순간, 이 선택은 이미 충분했다.
창밖으로는 낮은 하늘과 초록 들판, 그리고 느리게 흐르는 구름들이 지나갔다. 지금 이 풍경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 같은 기분.
여행 속 또 다른 여행이었다.
브라티슬라바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정한 목적지는 젤라또 가게였다. ‘여기 꼭 가봐야 해.’ 구글 지도 속 누군가의 말 한 줄이 전부였다.
하지만, 도착해서야 알았다. 도시를 돌아다니려면 버스 어플이 필요했고, 안타깝게도 왜인지 어플은 작동하지 않았고, 버스는 오지 않았다.
걸어서는 한 시간 넘는 거리라는 걸 짧게 생각한 건지, 내 체력을 과대평가한 건지, 고민할 것도 없이 그냥 걷기로 했다.
낯선 도시, 정보가 아무것도 없는, 슬로바키아의 여름은 생각보다 뜨거웠고, 나는 국토대장정이라도 하듯 햇빛과 땀 속을 묵묵히 걸었다.
젤라또 하나를 먹겠다고,
그 나라의 여름을 통째로 걷고 있었다.
길 위의 나는 조금 느렸고 그래서 더 자유롭게 느껴졌다. 낯선 공기,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지도를 확인하다가 멈춰 선 골목. 그 모든 게 계획하지 않은 하루가 줄 수 있는 선물 같았다.
해가 졌고,
비엔나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막차까지 남은 시간은 딱 한 시간. 방향을 바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니, 뛰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평화로웠지만 내 발걸음은 조급했다.
막차를 놓치면 당장 숙박할 곳도 없는, 버스카드도 없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라에서, 나는 국제미아가 된다는 생각으로 미친 듯이 뛰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역 입구가 보였을 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비엔나?!”
앞서 뛰던 여행자 한 명.
같은 목적지를 향한 그 말 한마디에, 그를 따라 같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의 동질감. 말도 안 섞은 사이지만
같이 뛰고, 숨을 헐떡이며 같은 기차에 올라탄 그 순간.
그건, 딱 한 철 짧은 전우애같았고, 서로를 바라보며 동시에 웃었다.
“너도 비엔나야?”
“응ㅋㅋㅋㅋ”
가까스로 열차에 올라탄 순간, 모든 게 정확히 제자리에 놓인 것 같았다.
그날의 나는 길을 단숨에 찾지도, 무언가를 완벽히 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 하루는 이상하게도 아주 잘 다녀온 여행처럼 느껴졌다.
걷다가 멈추고, 길을 헤매고, 때론 뛰듯이 하루를 보낸, 그렇게 흘러간 시간이, 누군가에겐 부족해 보일 수 있지만 나에겐 오히려 완벽한 하루였다.
여행에서 오래 남는 장면은
늘, 계획에 없던 순간들이다.
조금 불편하고,
조금 비효율적이며,
조금 더디게 흘러간 하루.
그렇게 무작정 걷고, 뛰고, 느리게 마주한 순간들이
오히려 가장 선명하게 남는다.
기억은 빠른 길보단 헤맨 골목을 오래 붙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