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SC가 끼친 영향
지난 9월 나는 갑작스럽게 번아웃을 경험했습니다. 매일 퇴근하고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 눈물을 멈출 수 없어서 집에 가면 방구석에 누워있었습니다. 불면증이 심해져서 하루에 2-3시간밖에 못 잤어요.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내게 번아웃이 왔는지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기에(이해할 여력이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에게 나에 대해 설명할 수도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어요. 나는 그저 그 시간을 보내는 데에만 집중했습니다.
예전에 저라면 "자책"하는 데에 온 에너지를 쏟았을 것입니다. 엄마가 되고 아이들에게 비난을 하는 것과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가 되지 않는다고 나 자신에게 비난하는 것이 얼마나 유해한 것인지 이미 충분히 체험했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고장 난 것처럼 보이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에 집중했어요.
나를 바라볼수록 내 안에 있는 공포감이 강렬하게 느껴졌습니다. 자기 비난의 자리에 무능력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고 나를 가득 채웠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고장 난 사람,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것 같아 불안했거든요. 내가 꿈꾸는 것, 내가 바라는 것, 내가 목표로 삼는 것에 다가가기 위한 그 모든 것들이 중단됐기 때문입니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앞서 나가는 것만 같아 보이고, 그래서 나는 뒤로 밀려나가는 것만 같아 나와 나의 삶에게 공포를 느꼈습니다.
나의 도반이자 스승님이 나의 상태를 보고는 "자기연민" 명상을 해보는 게 어떻냐고 진지하게 추천을 했습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 뭔지 그때 절실히 느꼈어요. 그래서 MSC(Mindfulness Self Compssion, 자기연민을 통한 마음챙김) 과정을 간절한 마음으로 신청했어요. 더 이상 뒤쳐짐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제발 잠을 자고 싶어서요.
MSC 과정을 하며 내가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바로 내 안의 공포가 바로 번아웃의 근원이라는 것을요. 내가 5살(지금의 나이로는 3살)에 목재를 싣는 큰 트럭에 부딪히는 사고를 경험했어요. 몇 달을 병원에 입원하며 부러진 뼈들은 아물었지만, 제 얼굴에는 큰 흉터가 남았지요. 퇴원을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의 일상은 달라졌어요. 나를 보는 사람들이 '나'를 보기 보다 나의 일부인 '흉터'에만 시선이 집중이 되더군요. 낯선 어른이 갑자기 나를 붙잡으며 얼굴의 흉터가 왜 생겼는지 묻는 일은 다반사였고, 어린 나는 점점 작아져갔어요. 나에게 뭔가 문제가 있구나, 나라는 존재는 잘못됐구나...라고 느끼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였을까요? 나는 잘못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고, 누군가에게 뭐든 잘하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썼습니다.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 없기에 나는 나를 지키고 보호하려고 필사적으로 애썼어요. 20대 중후반의 몇 번의 수술과 시술로 흉터는 많이 옅어졌지만 나의 필사적인 노력은 여전히 내 안에서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번아웃의 근원지는 바로 여전히 내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잘못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필사적인 노력(길지만 다른 말로 대체할 수 없는!)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번아웃이 지금에서야 온 이유는 5살 때부터 시작된 필사적인 노력을 이제는 잘 보내줘야 할 때가 됐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요.
"잘못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필사적인 노력"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버리고 싶어 했던 적이 있습니다. 자기 비난의 시기였지요. 그 시기를 지나고 나니, 그 노력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됐지요. 막상 바라보게 되니 너무나 공포스러웠어요. 나의 간절한 지푸라기였던 MSC 과정을 통해 그 노력을 따뜻하게 보듬어 줄 수 있게 됐어요. 어린 내가 얼마나 애썼을까, 그리고 그 애씀 덕분에 나는 또 많은 것을 이루며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나의 "잘못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필사적인 노력"을 따뜻하게 보듬어 줄 때, 나는 우리 아이들을 많이 떠올렸어요. 어리고 미숙하고 여린 존재가 아파할 때,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등을 토닥거려 줬던 것처럼 나 자신에게도 그렇게 해주었지요.
그때 내가 또 알게 된 게 있어요. 내가 간절히 바랐던 것이 무엇인지를요. 내 안에 상처받아 울고 있는 어리고 여린 내가 간절히 바랐던 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의 위로와 인정과 돌봄이었다는 것을요. 내가 못해도, 실수해도, 망신을 당해도, 일을 망쳐도, 뒤쳐져도, 바라는 걸 이루지 못해도 나는 나에게 나로서도 충분하다, 나이기에 안전하다는 말을 간절히 듣고 싶었더라고요.
그러자, 우리 아이들도 나와 비슷한 공포를 가지고 있고 비슷한 노력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됐어요. 그리고 내가 미워하는 어떤 사람도, 그리고 세상에 대부분의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고통 속에 있다는 것이 보였어요.
타인과 세상에 대한 미움과 원망, 질투가 조금은 사그라들었어요(물론 나는 여전히 활활 타오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그라드는 법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아요).
나는 내가 잘못된 존재임을 들키기 싫어하는 공포 속에서 하는 노력에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기꺼이 하려는 노력으로 약간(한 0.1도 정도??) 변화되어 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점점 조금씩 서서히 더 많이 변화하겠지요. 변화하지 않더라도 나는 나의 "잘못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필사적인 노력"에게 사랑과 응원을 보내주고 싶어요. 그리고 그런 사랑과 응원이 타인에게도 기꺼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우는 아이들을 달래본 엄마라는 경력 덕분에 나는 나의 여린 아이를 돌봐주고번아웃을 극복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나는
아이를 양육하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과 응원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