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의 화두는 자기 돌봄입니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었습니다. 자존감 높고 자기 의견을 잘 말하며 밝고 똑똑할 뿐만 아니라 배려심 많은 아이로 키우고 싶었습니다. 인간계가 아닌 거의 신적인 존재로 키우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땐 내가 노력하면 아이를 그렇게 키울 수 있을 거라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온갖 육아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좋다는 강의는 다 찾아들었고요. 그러나 그 방법들은 내 성격에 안 맞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참다 참다 참다 별거 아닌 일에 내 안의 시한폭탄에 불이 붙어 대폭발을 하는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시한폭탄을 마음에 품고 살던 나는 항상 예민하고 안절부절못하지 못했으며, 폭탄이 터지는 날에는 나의 마음도 아이들의 마음도 하얀 재가 되어 바람에 날아가버렸습니다.
이런 내가 싫어 코칭을 시작하게 되고 심리학 공부를 하며 알게 된 지극히 당연한 진리는 내가 나를 돌보지 않으면 그 누구도 돌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나를 돌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나를 돌보기 위한 일의 시작은 내가 스물일곱여덜살에 받은 심리상담입니다. 상담사 선생님께 찾아가 이야기했던 것은 "나를 사랑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였습니다. 한 상담사 선생님은 나에게 단점, 장점을 적어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단점과 장점은 종이 한 장 차이이고 별거 아니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음.. 도움이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상담사 선생님께 똑같은 질문을 했더니, 나의 엄마에 대한 상처를 이야기하게 하셨습니다. 그 상처를 치유하려 애쓰셨지만, 나는 끝내 엄마를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상담을 받고 난 후에 안타깝게도 나는 나를 더 사랑할 수가 없었으며 "자존감"이라는 것이 더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그분들에게 쓰였던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습니다. 비록 자존감을 탕진했지만, 호주머니에 있는 얼마 남지 않은 자존감을 탈탈 끌어모아서 어떻게든 내 살길을 내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내 자존감을 높여줄 사람을 찾다 보니 책임감 강하고 선한 지금의 남편을 만났습니다. 우연히 본 다큐멘터리에서 자연주의 출산의 경험이 엄마의 자존감을 높여준다고 해서 아이 셋을 조산원에서 낳았습니다. 아이들에게 화내고 싶지 않아서 나의 자존감을 높여줄 코칭이라는 새로운 학문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애, 자존감에 대해 10년을 고민하다 보니,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자기애가 무엇인지, 자존감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자기애, 자존감, 자기 돌봄... 이것의 공통점은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잘할 거야! 멋진 결과를 낼 거야! 등의 좋은 행동과 좋은 결과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냥 나의 존재에 대한 깊은 믿음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나만의 이유가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실수 속에서도 나의 선한 의도를 찾아주는 것입니다.
책을 읽고 있는데 첫째 둘째가 싸우고 우는 모습을 보면 화가 납니다. 엄마인데 아이들의 울음을 받아주지 못하고 화가 나는 나를 자책하지 않습니다. 내가 화가 났음을 인정해줍니다. 그리고 화의 근원이 독서로 나를 성장시키고픈 마음을 알아차려줍니다. 배움을 좋아하는 나를 응원해줍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화가 서서히 잦아집니다. 나를 자책하지 않게 됩니다.
나는 회사를 6년째 휴직 중입니다. 내 동기들은 다 승진을 했습니다. 몇몇 나의 후배들은 나보다 더 높은 직급이 되었습니다. 슬프고 조마조마합니다. 당장이라도 복직해서 나의 능력을 회사에 보란 듯이 펼치고 싶습니다. 그 마음을 가만히 인정해줍니다. 엄마가 아닌 나로서 살아가고 싶어 하는 나를 알아줍니다. 안아줍니다. 그리고 6년의 시간 혹은 더 길어진 휴직의 시간이 내 삶에 필연적인 일임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면서 휴직이 나를 또 다른 길로 연결해줄 거라 믿으며 지금 내가 좋아하고 신나는 일을 합니다. 내 마음에 집중하고 지금을 삽니다. 현존합니다.
자책하지 않고 현존하는 것. 그것이 자기애, 자존감, 자기 돌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밤에 첫째 아이가 막대사탕을 먹다가 막대가 부러졌습니다. 사탕이 방바닥에 떨어졌고, 다시 붙이고 싶다고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음... 잠투정이 시작됐음을 감지했습니다. 첫째 아이는 생후 3개월부터 만 3살까지 심한 잠투정을 했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종종 잠투정을 합니다.
첫째 아이의 잠투정은 졸리면 무조건 울고, 울다가 잠을 깨고 그러고 다시 더 가열하게 우는 공포의 뫼비우스 띠입니다. 달랠 수도 없고 달래면 더 울고 맙니다. 옆에 있는 사람도 거기에 같이 빠지게 되고 정신이 아득해지며 아이를 구타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가 올라오게 됩니다. 몇십 분째 악을 쓰며 우는 첫째 아이 옆에 있다가 아이를 학대할 것 같아 나의 뺨을 때렸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첫째 아이가 졸려서 울 때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죽을 것만 같은 고통입니다. 오늘 그 고통을 마주했습니다. 죽음의 공포 앞에 나는 얼어붙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의 울음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나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내 심장에 손을 얹혀 놓고 이 고통은 내 집에 온 손님이지 내가 아니라고 주문을 걸었습니다. 고통을 느끼는 나를 위로해줬습니다. 고통과 이어진 과거의 일을 함께 슬퍼해줬습니다. 20여분 뒤 아이는 울음을 그쳤다. 20분 동안 순간순간 아득해지고 고함치고 싶은 순간이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나를 더 연민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나는 아이를 안아줄 힘이 생겼습니다.
"뭐 때문에 울었어?"
"사탕이 부서져서, 치약을 내가 짜고 싶어서"
"정말 속상했겠다. 얼마나 하고 싶었으면 그렇게 크게 울었을까"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리는 첫째
"그렇게나 많이 속상했는데도 울음을 그쳤구나. 대단하다. 속상한 마음을 혼자 잘 정리했구나. 네가 울 때 엄마가 무슨 말해주길 바랬어?"
"안아줬으면 좋겠어"
"엄마가 '이리 와 안아줄게'라고 말하길 바랬어?"
아무 말 없이 눈물 흘리는 첫째를 꼭 안아주며
"그랬구나. 그랬어. 엄마가 안아주지 않아도 혼자서 울음 그친 네가 참 멋지다."
아이의 마음을 안아주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나의 마음을 안아주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아이에게 화가 난다는 것은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 내가 화가 났다는 뜻입니다. 나도 힘들어. 나도 아파. 지금 그대로도 엄마로서 충분해. 충분해. 충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