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생각샘 Feb 29. 2020

괴물 앞에 거울을 들이밀어야 할 자는 누구인가?

<고릴라 할머니>
                                 윤진현

구불구불 산골 마을에
새 각시 연지곤지 찍고 시집왔다네.
새 각시 복숭아꽃처럼 곱디고왔지.

대청마루에 식구들
배에서 꼬르륵꼬르륵.

곱디고운 새 각시 부뚜막에서
이리 종종 저리 종종.

식구들 냠냠 쩝쩝 맛있게 먹는 동안
곱디고운 새 각시 주름이 조글.

광주리에 빨랫감 한가득
고약한 냄새가 풀풀.

곱디고운 새 각시
냇가에서
조물조물 팡팡.

빨래들 바람에 하늘하늘 춤추는 동안
곱디고운 새 각시 주름이 조글조글.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가고....

곱디고운 새 각시 거칠거칠해졌네.



윤진현 작가의 그림책 “고릴라 할머니”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어야 하는데 목이 메어 끝까지 읽을 수가 없었다.

밥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아이 키우고, 농사일까지 하는 그녀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온 삶의 순간이 힘겨운 노동으로만 채워졌던 그녀들의 삶이 얼마나 처참했을지 나는 감히 상상도 되지 않는다.


내가 결혼하기 전에 결혼 생활을 막 시작한 친구에게 물었다.

“결혼하니 어때?”

“집안일은 정말 신기해. 안 하면 티가 나고, 하면 티가 안 나.”

그 친구는 무슨 영혼이 털리는 마법이라도 보고 온 양 얼빠진 표정으로 대답했었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다. 내가 결혼을 해보니 해야지만 티가 안나는 그 마법 같은 집안일이 시지프스의 돌덩이처럼 느껴졌다. 빨래를 힘겹게 굴려 올려도 또 떨어지고, 설거지를 힘겹게 굴려 올려도 또 떨어지고, 청소를 힘겹게 굴려 올려도 또 떨어졌다. 밥상 차리는 것을 힘겹게 굴려 올려도 돌아서면 또 떨어져 있었다.

나는 그 끔찍한 노동의 굴레에 직접 얽매여 보고야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녀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고등학교 시절 정신없이 자다 새벽에 깨서 주방으로 나왔는데 그때까지도 안 자고 있던 엄마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울고 계셨다. 깜짝 놀란 내가 왜 그러냐고 묻자, 엄마가 서글프게 웃으며 말했다.

“그냥 너무 힘들어서. 밤늦게 까지 공장에서 일하고 집에 왔는데 설거지 산도 있고, 빨래 산도 있고, 청소 산도 있네. 그런데 아무리 해도 해도 끝이 안 나. 내가 저 산을 다 없앨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너무 힘들어서 눈물이 났어.”

그 눈물의 무게를, 서글펐던 웃음의 고통을, 나는 결혼을 하고야 알았다.


 처참한 노동의 굴레, 그 힘겨운 노동의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으니 누군가에게 나 대신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시어머니에게 그 노동의 십자가를 떠넘긴 적이 있다. “어머니 아들과 나는 함께 짊어져야 하는데 아들이 너무 귀해서 못 짊어지게 했으니 그럼 당신이 대신 지십시오.”라는 비겁한 변명과 함께.

시어머니는 아들이 며느리와 함께 얽매여야 하는 노동의 굴레에 얽매여, 아들이 며느리와 함께 끌어올렸어야 할 돌을 본인이 대신 열심히 끌어올리며 괴물이 되어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한 가지 더 고백할 게 있다. 사실 나는 맹구 2를 송편과 비교하며 놀리는 걸로 끝내지 않았다. 시부모님이 와서 같이 빚으라 했는데도 안 하겠다고 버티며 TV만 보는 맹구 2에게 내가 말했다.

“도련님, 송편 몇 개 빚는다고 떨어질 부실한 불알이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 아니에요? 불편하게 달고 다니지 말고 떼 버리세요. 이리 와요. 내가 확 잡아 떼 줄 테니.”

맹구 2는 울음을 삼켰고, 시어머니는 낄낄거리며 말씀하셨다.

“야, 야, 그만 해라. 애 울겠다.”

본인은 할머니가 너무나 귀애하던 불알 달린 손자라 할머니 차례상에 놓을 송편 한 개도 만들 수 없다고 끝까지 버티던 맹구 2가 당신이 손수 만든 음식을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차례상에 올리는 시어머니를 보며 그건 거기에 두는 게 아니라고 지적질을 할 때, 난 진심으로 웃음이 나왔다.

‘저건 정말 심금을 웃기는 병신 같은 놈이구나!’

 그 병신 같은 놈을 애지중지 키웠을 시골에 계신 작은어머니가 그 귀한 아들에게 내가 부실한 불알을 떼 버리라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아시면 나의 머리채를 잡으러 오실 거다. 아니 사실 알고 계실지도 모른다. 그다음 해 시골에 갔을 때 작은어머니는 당신이 태운 밥을 보며 나를 보고 한마디 하셨고, 나의 시어머니에게 더 큰 소리를 들으셔야 했다. 다른 사람이 당신 며느리를 구박하는 꼴은 절대 용납하지 않으셨던 시어머니는 왜 그렇게 나를 구박하셨을까?


그토록 나를 구박하던 시어머니의 용심은 과연 하늘이 내린 걸까?

시어머니를 괴물로 만든 것은 누구일까?

나도 언젠가 시어머니가 되고, 하늘이 내린 용심을 받을 테니 기꺼이 그  괴물을 이해하고 똑같은 괴물이 되어야 할까?

괴물이 되어 나의 소중한 아들이 아내 앞에서 처참하게 일그러져 비통한 통곡을 하도록 해야 하는 것일까?

엄마 친구를 미친년으로 만들고, 암에 걸린 이모를 며느리가 버리고, 남편의 엄마를 미친개로 만든 건 누구일까?


결국, 우리들의 엄마를 괴물로 만든 건 누구일까?


우리들의 엄마가 괴물로 변한 모습을 스스로 볼 수 있도록 괴물 앞에 거울을 들이밀어야 할 자는 누구일까?

주름진 고릴라 할머니의 주름을 없앨 수는 없지만, 울부짖는 고릴라 대신 미소 짓는 고릴라라도 될 수 있게 돕는 것은 누구의 할 일일까?


이전 23화 Mirare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