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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샘 Feb 26. 2020

엄마, 나도 호박이야!


“좁쌀이 아무리 굴러봐야 좁쌀이지. 좁쌀이 수천 번을 굴러봐라. 호박이 한 번 구르는 거 따라가겠냐? 니가 나가서 돈 좀 번다고 아무리 고생해봐야 몇 푼이나 벌겠어. o서방 하는 일은 아직도 그렇냐?”

“그렇지 뭐.”


 핸드폰이 전해주는 엄마의 목소리에 딸에 대한 안쓰러움이 묻어있다. 엄마는 딸이 어린 아들을 두고 일을 나가는 게 영 마뜩잖다. 그래도 애는 애엄마가 봐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나 역시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돈을 벌러 나가는 건 싫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림하면서 살뜰하게 자기 아이를 보살펴주는 아이 엄마들이 제일 부러웠다. 여자는 좁쌀이라는 엄마의 말에 그건 아니지 라고 부정하지 못한 것은 어린아이를 두고 밖에 나가 일하는 딸을 둔 엄마의 마음을 더 후벼 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의 마음을 후벼 팔 기회는 결국 오고야 말았다. 일 년에 두어 번 갈 수 있는 친정나들이는 늘 그렇듯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가 늘 그렇듯 괴롭고 무거운 마음으로 와야 했다.


“아이고, 이모 불쌍해서 어쩌니?”

“이모가 왜? 암이 다른 곳으로 전이됐어요?”

“아니, 이모 며느리가 이모한테 연락도 안 하고 연락도 하지 말라고 했단다.”

“왜?”

“영구 있는 홍콩으로 며느리가 따라가서 살겠다고 그래서 못 가게 했더니 그런단다.”

“아니, 남편 있는 곳으로 가겠다는데 이모는 왜 말리는 거야?”

“애들도 아직 학생이고 이모가 암인데 며느리는 남아서 애들 건사도 하고 이모 병원에도 같이 가고 그래야지.”

“헉! 그래서 이모가 가지 말라고 한 거야? 애들 다 컸고 거기서 학교 다녀도 되는데, 시어머니 병원 가야 한다고 나이도 젊은 며느리를 아주 생과부를 만들면 어떻게 해! 이모부랑 작은 오빠는 뭐하고?”

“뭐 하긴... 뭐.. 일하겠지.”

“이모도 진짜 어지간히 시집살이시킨다. 언니 혼자 그렇게 몇 년씩 병든 시어머니 모셨으면 됐지. 이제 이모부랑 작은 아들보고 하라고 해. 며느리한테만 독박 씌우니까 며느리가 연락하지 말라고 하지.”

“이모가 무슨 시집살이를 시켜. 자기 며느리를 얼마나 이뻐하고 며느리한테 잘해주는데. 며느리 위해서 김치냉장고도 사주지. 밥통도 사주지.”

“흥! 그게 며느리 위해서 사준 거라고? 어이가 없네. 오빠랑 손자 밥 잘해 먹이라고, 오빠랑 손자 위해서 사주는 거지. 하, 내 귀에는 그냥 왈왈이 아닌 멍멍 소리로 들려요.”

“그게 무슨 소리냐?”

“왈왈이든 멍멍이든 시어머니가 며느리한테 짖는 소리라고요.”

“뭐?! ㅈ..짖?! 야! 너 내가 그렇게 가르쳤냐? 뭐.. 짖는 소리?”

“그러니까, 왜 딸들만 그렇게 가르치는데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엄마가 나한테 툭하면 시부모님한테 잘하라고, 내가 뭐 쫌만 하려고 하면 너 시부모님 앞에서도 그렇게 까불 거냐고, 세뇌를 시키면서 키웠잖아요. 그런데 엄마가 엄마 아들한테, 이모가 이모 아들한테 그런 말 한 번이라도 한 적 있어요? 아들들은 그저 기죽으면 안 된다고 할 말 당당하게 하라고 큰 일 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딸들은 입 꾹 다물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기 팍팍 죽이면서 키웠잖아요. 그런데 딸들은 뭐 하고 싶은 일이 없겠어? 엄마, 아들만 호박이 아니라 나도 호박이에요. 나도 한 번 크게 굴러보고 싶은 꿈이 있다고!”

“그건 너 고생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지. 니가 벌어봐야 얼마나 벌겠냐!”

“내가 o서방보다 돈도 훨씬 잘 벌어요. 그런 내가 시집에서 노예나 되려고 악착같이 공부해서 대학까지 나왔냐고요. 사위한테는 절절매면서 왜 며느리한테는 그렇게 함부로 하는 건데? 미안하지만 엄마가 언니 흉보는 거  듣기 너무 거북해요. 나도 시어머니랑 연 끊었거든.”

“ㅁ..뭐?!”

“그렇게 됐어.”

“왜! 니가 왜!”

“시어머니가 너무 힘들게 해서.”

“너희 시어머니 너한테 잘해주신다며!”

“내가 엄마를 속인 거지. 잘해주긴 뭘 잘해줘.”

“그게 무슨 말이야. 십 년 동안이나 속였냐? 말이 되야지!”

“응. 십 년 동안 속였어요.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내가 했네.”

“왜 속였는데?”

“몰라서 물어요? 내가 결혼해서 속 썩고 있다고 하면 엄마 마음만 아프지. 뭐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말을 했어야지!”

“하면 뭐해. 엄마가 와서 시어머니 멱살이라도 잡아줄 것도 아니고.”

“내가 왜 못해! 내 딸 괴롭히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엄마, 언니네 친정엄마도 이모 멱살 잡으러 오고 싶을 수도 있어.”

“뭐?”

“이모랑 같이 며느리 흉보는 거 그만 하라고. 언니가 오빠랑 가정 꾸려서 행복하게 살려고 결혼했지. 시집에서 종살이하려고 결혼한 거 아니잖아.”

“누가 종살이를 시켰냐!”

“본인 수발들라고 며느리 생과부 만들려고 했다며! 저번에는 이모 없을 때 이모부 밥상 안 차렸다고 흉봤잖아. 언니가 자기 애들 돌봐야지. 왜 그 먼 시가까지 가서 이모부 밥상을 차리고 있어. 이모부는 손 없어?”

“며느리가 있는데 왜 이모부가 밥상을 차리냐?”

“에휴... 우리 시어머니랑 똑같이 말하네. 며느리가 있는데 왜 당신이 밥상을 차리냐고. 그래서 내가 시어머니랑 연을 끊은 거야. 자기 아들은 손 끝에 물만 닿아도 벌벌 떨면서 며느리는 노예 취급하고 못 부려먹어서 안달을 부리고 난리를 쳐서.”

“너희 시어머니가 너를 어떻게 부려먹었는데?”

“잠을 안 재우고 일을 부려먹으려 하질 않나, 손자한테 엄마가 남자랑 전화 통화 하나 안 하나 감시하다가 와서 이르라고 하질 않나... 암튼, 일이 많았어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뭐?! 내 이 놈의 여편네를!!”

“흐흐흐. 왜? 뭐 쫓아가서 머리 끄덩이라도 잡으시게? 시어머니 머리끄덩이 잡고 한바탕 돌릴래요?”

“그렇게 무식하게라도 하면 니 맘이 좀 시원해지겠냐?”

“아니, 이모랑 며느리 흉이나 보지 마요. 오빠가 처가에 가서 밥상 차리도록 시킬 거 아니면 며느리한테도 바라지 말아야지.”

“아후, 요즘 애들은 우리랑 달라도 너무 다르다. 우리 때는 며느리가 그렇게 밥상 차리는 건 당연했어. 안 하는 게 이상한 거지.”

“엄마 말대로 세상이 달라졌잖아요.”

“그래, 너희 시어머니나 네 이모나, 우리야 딸이라고 안 가르치니 못 배웠고, 며느리라고 죽도록 일만 시켰으니 아무것도 모르고 무식해서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너희는 니들 말대로 많이 배워 다르다면서 그렇게 뭐 좀 맘에 안 든다고 시어머니랑 연을 똑 끊어버리는 게 정말 잘하는 거냐?”

“.....”

“니들은 많이 배운 세대니까 니들이 억울한 거 조목조목 따지기라도 잘하지. 우리들은 배운 게 없어서 그걸 잘 못해. 이뻐도 이쁘다고 표현 못하고 억울해도 뭐가 억울한 건지도  모르고. 우리는 말을 잘 못하니까 말로는 너희한테 당해낼 수가 없지. 그냥 무식하게 심술이나 부리는 거지.”

“그래서, 엄마는 내가 그 무식한 심술을 견디면서 계속 노예처럼 죽도록 일만 했으면 좋겠어요?”

“아니 그러면 엄마도 속상하지.”

“그럼 어떻게 하라고!”

“시어머니한테 너무 모질게 하지는 말라고. 나중에 죄받을라.”


엄마를 통해, 나의 병은 깊다.

착한 며느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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