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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샘 Feb 23. 2020

끝나지 않은 상처

평온한 밤이었다. 아이는 일찌감치 재우고 남편과 나는 서로 기대고 앉아 유쾌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웃고 있었다. 내가 다정하게 말했다.

“자기는 무능력하고, 어머니는 파렴치해.”

마치 사랑이라도 속삭이는 것처럼 달콤하고 여유로운 말투였다. 그래서 남편은 당황했다. 한참을 경직된 표정으로 나를 보던 남편이 항의했다.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맞아. 자기야, 정말 심한 말이야. 그 말은 누가 들어도 불쾌할 거야.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하냐고 따져 물을 거야. 하지만 그 심한 말이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행동을 누군가 했다면, 그 행동을 당한 사람의 삶은 그야말로 처참했을 거야. 그렇지? 난 그 심한 말이 둘에게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는 것을 증명할 많은 일들을 기억하고 있어. 그리고 지난 십 년 간 내 삶은 처참했어.”

남편이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해. 이제 달라질 거야.”

“뭐가?”

“이제 내가 지켜줄게.”

“이제 와서? 지금까지 뭐 하다가?”

“그땐 내가 몰랐잖아.”  

“알았어야지.”

“.....”

“그 밤에 내가 울 때 내 옆에 있었어야지.”

“미안해.”

“나는 내가 지킬게. 오빤 오빠나 지켜.”

“.....”

“오빠가 삶을 포기할까 봐 내가 불안하지 않도록 오빠 자신이나 지켜.”


 시어머니와 연을 끊겠다고 선언한 이후 우리의 싸움은 줄었다. 싸울 일이 없었다. 그날이 그날 같은 세월을 조용하게 흘려보냈다.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 아이를 함께 키웠다. 그러면서 문득문득 시어머니가 떠오르는 날은 설거지하면서 달그닥 거리는 소리가 커지고, 청소기를 한 단계 높여 더 큰 소리로 돌리고, 자전거를 타고 나가 사람이 없는 거리를 질주했다.

그래도 여전히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오빠, 어머니는 어디에서 누구한테 그런 걸 배우셨을까?”

“뭘?”

“며느리한테 해서는 안 되는 말과 행동들.”

“글쎄.”

“혹시, 오빠 할머니가 지독한 시어머니였어?”

“나는 모르지. 난 시골만 가면 밖에서 놀았는데 어떻게 알아. 그런데 왜?”

“어머니가 그러시는 게 본인이 당한 걸 그대로 하시는 건가 싶어서.”

“음, 그럴 수도 있겠구나.”

“오빤 대체 자기 엄마에 대해 아는 게 뭐야?”


 나는 일이 늘어 거의 매일 퇴근이 늦었고 남편이 일찍 퇴근해 아이의 저녁을 먹이고 재우는 날이 늘어갔다. 그러다가 몇 주만에 함께 저녁을 먹을 기회가 생겼다. 식사를 하고 있는데 남편의 핸드폰이 울렸다. 남편이 어두운 얼굴로 핸드폰을 들고 방으로 가더니 금방 다시 돌아왔다.

“누구야?”

“엄마.”

“무슨 일이신데?”

“손자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바꿔달라고.”

“근데 왜 그렇게 금방 끊어?”

“네가 싫어할까 봐.”

“뭐? 기가 막혀서. 그래서 뭐라고 말씀드렸는데?”

“그냥 나중에 다시 전화하겠다고 하고 끊었는데.”

“아, 답답해. 그렇게 하니까 어머니가 서운해하시지. ‘아이가 식사 중이니까 조금만 있다가 다시 전화드릴게요.’라고 상황을 설명해야지 이해하실 거 아니야.”

말을 하고 있는 중에 다시 남편의 핸드폰이 울렸다.

“어, 알았어. 끊어.”

“이번엔 또 누군데?”

“맹구.”

“왜?”

“엄마 우신다고.”

“하, 그래서 바로 득달같이 전화한 거야? 참, 당신이나 맹구나 답답하긴 마찬가지구나.”

“.....”

“식사 끝나자마자 어머니한테 전화드려. 그리고 당신은 나랑 얘기 좀 하자.”


식사 후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리고 아이가 없는 곳에서 남편과 마주 앉았다. 고구마 백 개를 물 없이 먹은 것처럼 답답하고 거북했다.

“자기는 왜 내가 싫어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엄마가 잘못하신 게 있잖아.”

“어머니가 잘못하신 게 있어도 당신 어머니야. 그래, 당신 말대로 내가 싫어한다고 치자. 그러면 그렇게 내 눈치를 보느라 당신 부모님하고 통화도 안 하고 살 거야? 자기 부모님이랑 통화도 못하게 하는 배우자라면, 그런 여자랑 대체 왜 사는 건데?”

“그러게.”

“맹구도 그래. 어머님이 속상해서 우셨어. 그런데 그 이유가 형이 나중에 전화하겠다고 바로 끊어서래. 그러면 형이 지금 무슨 일이 있으니까 그런 걸 텐데 그게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 엄마한테 ‘형이 무슨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걸 테니까 좀 기다려 보시라’고 말씀을 드려야지. 바로 형한테 전화를 하면 어쩌자는 건데? 너희가 무슨 일이 있든 말든 상관없이 무조건 우리 상황에 맞춰라 이거야? 왜 맹구는 항상 저러는 건데? 지난 십 년 간 그렇게 산 게 잘못 됐으니까 지금 이 지경까지 온 거잖아. 둘 다 사리분별이 안 돼? 맹구한테 가서 따끔하게 말해. 두 번 다시 그러지 말라고. 둘이서 아주 사이좋게 어머니를 생떼밖에 쓸 줄 모르는 고집쟁이 아이로 만들고 있다고. 어머니 어른이시잖아. 어른이 어른답게 행동을 못하시면 그러시지 말라고 말씀을 드려. 당당하고 공손하게!”

그러면서 생각했다. 나는 왜 그렇게 못했을까? 아니, 나는 왜 ‘계속’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어머니가 나를 죽이려고 해서?

“나는 오빠가 오빠 부모님이랑 통화를 하고 찾아뵙는 거 싫지 않아. 그건 내가 좋고 싫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오빠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내 눈치 보지 말고 오빠가 해야 하는 일을 해.”


며칠 뒤 주말 내내 신랑의 표정이 무거웠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일이 잘 안 돼?”

“아니.”

“그럼 뭣 때문에 그렇게 표정이 어두운 건데? 기회 줄 때 말해.”

“부모님, 이혼하실 것 같아.”

“왜?”

“엄마가 너한테 사과 안 한다고 아버지가 화가 나셔서 가출하셨어. 그런데 엄마는 아버지가 가출했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TV만 보면서 깔깔깔 웃고 계시더래.”

“와~우! 참, 쉽고 빠른 LTE급 비겁함이구나.”

“무슨 소리야?”

“아버님 말이야. 만약 내가 두 분의 딸이었다면, 나는 어머니보다 아버님한테 더 많은 잔소리를 했을 거야. 아마 득달같이 달려가서 아버님 귀에 피가 나도록 잔소리를 퍼부었을걸. 딸이 없어서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 모르겠다.”

“왜?”

“그렇잖아. 어머니가 나한테 그러실 때 아버님 안 보고 계셨어? 뭐 아버님은  모르고 계신 줄 알아?”

“....”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어. 어머니가 며칠 전부터 밤새도록 혼자 명절 준비를 하고 제사 준비를 하고 그래서 아버님의 돌아가신 부모를 모시고 아버님의 형제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는 걸 알고 계셨다고. 어머님이 그 짐을 내가 대신 짊어지지 않는다고 나한테 소리를 지르며 패악을 부리는 걸 오빠는 못 봤어도 아버님은 여러 차례 보셨어. 그래도 입 다물고 계셨다고. 왜? 본인의 이익을 위해. 우리가 서울 올 때 처음에는 친정 근처로 가려고 했잖아. 그때 어머니 몰래 우리를 불러 시가 근처로 오도록 했던 것도 아버님이었어. 어머님한테 아이를 맡기라고 했던 것도 아버님이었다고. 왜? 당신이 손주를 가까이 두고 보고 싶었으니까. 아버님은 그렇게 본인의 욕심을 위해 어머니가 고생하시는 것도 알면서 눈감고, 어머니가 나한테 심하게 하시는 걸 알면서도 눈감고 있었다고. 그런데 이제 며느리 잃을 거 같으니까 모든 잘못을 어머니한테 덮어 씌우면서 본인만 빠져나가려고 하시는 거야?”

“그러네.”

“응. 아~주 음흉하게 비겁하셔. 그러니까 가서 말씀드려. 이제 와서 그렇게 비겁하셔도 아무 소용없으니까 아버님의 욕심을 위해 40년 넘게 헌신했던 당신의 아내나 지키시라고.”


 시아버지가 시어머니를 협박하기 위해 가출하신 동안, 빈 집에 혼자 앉아 TV를 보며 깔깔대고 웃는 시어머니의 모습을 상상하자 나도 실실 웃음이 나왔다. 시어머니가 하신 일 중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몇 년 전 일을 떠올렸다.


 언제부터인가 시어머니의 두 번째 동서인 작은어머니가 제사에도 명절에도 오시지 않았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작은어머니는 목회자가 되시겠다며 무슨 수도원인가에 들어가 공부를 하시느라 두문불출이라고 하셨다. 동서들이 다 각자의 사정으로 오지 않자 시어머니는 홀로 남은 며느리가 되어 당신 시부모의 제사상을 준비하면서 주절주절 주문처럼 작은어머니를 욕했다. 지켜보던 내가 어머니한테 말했다.

“어머니, 전 작은어머니가 잘하시는 거라 생각해요.”

“그게 뭘 잘하는 거냐! 며느리가 시부모 제사를 모셔야지!”

“작은아버지도 당신 부모의 제사상을 단 한 번도 자기 손으로 차려본 적이 없으신데 작은어머니가 왜요?”

“뭐?”

“그러니까 작은어머니가 잘하시는 거라고요. 어머니도 제사 모시지 말고 그냥 쉬세요. 할머니, 할아버지의 아들 딸들이 그렇게 많은데 왜 단 한 사람도 코빼기를 안 비추고 며느리인 어머니 혼자 그걸 껴안고 계세요? 그냥 어머니도 어머니 인생 찾으세요. 제가 응원해드릴게요.”

“그럼 네가 대신 제사상 차릴 거냐?”

“아니요. 제가 왜요? 저도 제 인생 찾아야지요. 저 지금 와서 돕는 것도 어머니 때문에 하는 거예요. 얼굴도 한 번 뵌 적 없는 남의 할머니 할아버지 제사에 제가 무슨 관심이 있겠어요. 제 할머니 할아버지 기일에도 바빠서 미사를 못 가는데요. 어머니 몸도 편찮으신데 혼자 고생하시는 거 옆에서 보기 안타까워서 도와드리는 거예요. 어머니도 안 계시면 저는 제사에 오지도 않을 거예요. 제가 만약 어머니 딸이었다면, 저 제사상을 뒤집어엎었을 거예요.”

시어머니는 맥없이 웃으셨다. 그리고 더 이상 당신의 동서인 작은어머니를 욕하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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