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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샘 Feb 17. 2020

우리 이제 그만 하자

 우선 시어머니가 갑자기 나를 불러 밤새 부려먹으려 했던 그 날, 나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나 대신 본인 아들을 부려먹고 있는 대로 약이 올라 나에게 악을 쓰던 그날을 사과받고 싶었다. 하지만 절대 사과하지 않을 분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결과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필요한 과정이기에 남편에게 전했다.


“김장을 할 때 내가 왜 갈 수 없었는지 가서 설명드리고 와. 내가 아팠고, 오빠는 김장한다고 나한테 전하지도 않았고, 알았다 하더라도 나는 갈 수 없었다고. 왜 어머니가 나한테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건지 가서 잘 설명을 드리고 사과를 하셨으면 좋겠다고 전해드려.”


 남편은 알았다고 했고 본인의 엄마가 금방 사과를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 해도 며느리 도리를 해야 한다며 일을 부려먹을 분이고, 본인 뜻대로 나를 부려먹지 못하면 있는 대로 심술을 부릴 분이고, 본인은 잘못한 게 하나도 없으며, 있다고 하더라도 며느리 따위에게 사과를 하실 분이 아니라는 걸. 10년 치의 경험을 통해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역시나 시어머니는 사과를 하지 않으셨고 남편은 당황했다. 하지만 예상하고 있던 나는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미 마음을 정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을 정하기까지는 힘들었지만 결정하고 나니 오히려 홀가분했다. 아이를 재우고 남편을 마주 보고 앉아 차분하게 말했다.


“오빠, 오빠네 부모님한테 가서 말씀드려. 이제 며느리는 없다고. 나는 이제 그분들 며느리가 아니라고.”

“그렇게 까지 해야 해?”


 나는 조용하고, 단호했다.


“응. 그렇게 까지 해야 해. 오빠도 어머니가 잘못하고 계신 거 알잖아. 그런데도 사과하지 않으시는 거 오빠도 당황스러워했잖아. 그냥 넘어간다면 나는 계속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야 해. 나는 이제 그걸 허락하지 않을 거야.”

“알았어.”

“이번에는 절대로 감추지 마. 오빠는 항상 우리가 얼마나 힘든지 부모님께 감추는 게 효도라고 했잖아. 나는 이제 더 이상 감추지도, 참지도 않을 거야.”

“......”
“사실 오빠가 더 힘들까 봐 말 안 했지만 어머니는 나한테 참 심하게 하셨어.”


 나는 그제야 남편에게 지난 일들을 이야기했다. 어머니가 나한테 했던 폭언들. 해서는 안 되는 행동들에 대해.

한마디도 없이 듣고만 있는 남편의 얼굴이 파래졌다가 빨개졌다가 하얘졌다가 다시 파래지고 있을 때 내가 말했다.


“오빠도 이제 감추지 말고 가서 다 말씀드려. 십 년 동안 내가 오빠 먹여 살렸고 살림하고 애 낳고 키웠다고. 사실 어머니는 알고 계시면서 인정을 안 하시긴 하지만, 그러니까 오빠가 오빠 입으로 직접 말씀드려. 오빤 생활비 가져다준 것보다 빚진 게 더 많고 그거 수습하느라 내가 상처 받고 있는지도 몰랐다고. 그래도 나나 우리 친정에서 싫은 소리, 싫은 내색 한 번 한 적 없었다고. 나는 항상 밥도 굶고 일하면서 남의 집에서 눈치 보느라 화장실 가고 싶은 것도 참고 밤늦게까지 돈 벌어 온 거라고. 그렇게 가족들 부양하는데 어머닌 시부모님이랑 시집 식구들이 먹을 김치를, 나는 먹지도 못할 그 김치를 밤새도록 담그라고 하신 거라고. 아파서 못 갔다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화내신 거라고. 그동안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가서 남김없이 다 밝히고 와. 젖병도 거부하는 젖먹이 아기를 열 두 시간씩 떼어놓고 하루 종일 쫄쫄 굶을 새끼 생각하면서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를 악물고 돈을 벌어왔는지. 시퍼렇게 불어 터진 젖 겨우 물리면서 피눈물 흘릴 때 어머니가 나한테 하신 말씀이 아직도 내 가슴에 피멍으로 남아있다고. 내가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버틸 때 어머니가 나한테 어떤 폭언과 만행을 저질렀는지 가서 다 말하고 와. 어머님. 아버님. 도련님. 다 듣게. 다 말하고 와. 감추고 숨겨서 나 혼자 고통받게 하지 마. 더 이상 나 그 집 노예 아니야.”
남편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난 이제 그 집 며느리 하지 않을 거야. 동의할 수 없다면, 우리 이제 그만 하자.”

남편의 얼굴이 정지했다.

“뭘 그만 해?”

“우리. 이혼하자고.”

“뭐?”

“나는 이제 오빠랑 살 수 없어. 난 오빠 어머니를 죽이고 싶었거든. 어머니는 나를 죽이려 하고 나는 내가 살고 싶어서 어머니를 죽이고 싶었다고. 그런 상황을 만드는 사람들과 내가 어떻게 살아? 그런데 아무런 해결책 없이 계속 그렇게 살아야 한다면, 여기서 그만두는 게 맞아.”

“미안해.”

“나는 이제 지쳤어. 이제 정말 못하겠어. 이제 제발....”

“.....”

“나 좀 놔줘.”

“미안해. 정말 미안해.”

“미안하다고 하지 마. 정말 미안하다면 나를 지켰어야지.”

“미안해. 내가 널 지켜줬어야 했는데, 네가 날 지키고 있었구나.”


남편이 운다.

내가 힘들다고 할 때마다 가장 먼저 달려왔던 남자가

내가 지켜주고 싶었던 남자가

허물어져 운다.

세상에서 가장 처참하게 일그러져 소리도 못 내고

처절하게 운다.

남편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가슴으로 들린다.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어둠 속에 누워서 나는 우리의 과거를 생각했다. 처음 사랑에 빠졌던 그때를.

나는 아무것도 없는 이 남자가 좋았다. 아무것도 없어도 함께 있으면 행복했고, 영원히 그럴 것이라 믿었다.

그 달콤한 사랑에 젖어 한 없이 행복할 줄 알았던 그때, 나는 남편의 꿈을 지켜주고 싶었다.

“오빠, 나는 나중에 우리가 늙었을 때, 오빠가 ‘너랑 살려고 나는 꿈을 포기했어’라는 말보다 ‘너랑 살아서 꿈을 이룰 수 있었어’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라는 말로 그의 꿈을 지지했다. 나는 사랑에 단단히 미쳤었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온몸을 던져 상상할 수 없는 힘으로 내 콩깍지를 벗겨냈다.

나는 시어머니한테 졌다.


무거운 어둠 속에서

끊어질 듯 말 듯

흐린 소리로

남편을 불렀다.


“자기야,

십 년 밖에

못 참아서

미안해.”


남편도

끊어질 듯 말 듯

울음 섞인 소리로

속삭였다.


“십 년이나

참게 해서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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