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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샘 Feb 20. 2020

나는 이제 며느리가 아니야!

수술 날짜를 잡았다. 병원에 일주일 간 입원해야 했다. 수술 전날도 어김없이 밤 11시까지 일을 하고 12시가 넘어 혼자 입원실로 들어갔다. 미리 연락을 받았던 간호사가 나를 보며 웃었다.

“엄청 바쁘신가 봐요. 보통 수술 전 날까지 이렇게 늦게 일하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이건 뭐 수술 당일 입원이네요.”

나도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요즘 같은 때에 수술 전 날까지 일할 수 있는 걸 감사해야 하는 건지 수술을 하면서라도 쉴 수 있는 걸 감사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수술을 한 다음 날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왔다. 남편이 잠깐 편의점에 간 사이 아이가 말했다.

“엄마, 할머니랑 아빠랑 싸웠어.”

“저런, 왜 싸웠을까?”

“몰라. 할머니랑 아빠랑 방에서 문 닫고 엄청 소리소리 지르면서 막 싸웠어. 내가 삼촌한테 왜 싸우냐고 물어봤더니 삼촌이 싸우는 거 아니고 그냥 얘기하는 거래. 그런데 내가 봤을 때 딱 싸우는 거였어. 왜 싸웠을까?”

“글쎄, 엄마도 모르지. 그런데 너도 친구들이랑 놀다가 싸울 때가 있는 것처럼 어른들도 그럴 때가 있을 것 같아. 네가 친구들이랑 싸웠다가 또 화해하는 것처럼 어른들도 화해할 거야.”

“할머니랑 아빠도 화해할까?”

“그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을 한 병원은 새로 지은 건물에 막 개원한 곳이라 환자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 넓은 다인실에서 일주일 내내 혼자 지낼 수 있었다. 혼자 밥 먹고, 혼자 책 읽고, 혼자 생각에 잠기는 휴식 시간을 갖는 게 얼마만인지. 수술을 한 게 오히려 축복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만큼 나는 바쁘게 살았다. 몸도 마음도 쉴 수 있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나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지난 십 년의 세월을 돌아보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나를 지키지 않았다.

이제 내가 나를 지켜야 할 때가 왔다.


퇴원하는 날, 남편은 조용히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돈. 엄마가 너 수술비 하라고 200만 원 주셨어.”

“뭐?! 그걸 받아오면 어떻게 해!”

“나도 네가 안 받을 거 같아서 거절했는데, 엄마가 너 몰래 나보고 쓰래.”

“정말 나랑 끝내고 싶어? 그게 무슨 돈인지 몰라? 그거  당신이 당신 부모한테 효도한답시고 나를 노예로 팔고 받는 돈이야! 그거 나 몰래 받아서 쓰고 나는 또 당신 부모의 노예가 되라고? 노예한테도 해서는 안 되는 행동들을 또 당하면서 살라는 거야? 당장 돌려드리고 와!”


퇴원을 하고 며칠 후 잠자리에 들려는 남편에게 물었다.

“지난번의 그 돈은 확실하게 돌려 드린 거지?”

“응.”

“어머니한테 말씀은 드렸어?”

“뭘?”

“나 이제 며느리 그만 한다는 거. 이제 그 집 며느리 아니라는 거.”

“어.”

“내가 며느리 노릇 안 하겠다고 했는데 오빠한테 사위 노릇을 하라고 할 수는 없어. 앞으로 오빠도 처가에 가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가서 잘 말씀드릴게. 뭐 결혼하고 지금까지 바쁘고 여유가 없다고 친정에 간 적도 뭘 해드린 적도 없으니 앞으로 안 한다고 해도 뭐가 달라진 건지 눈치도 못 채시겠지만.”

“미안해. 네 말대로 난 처가에 한 게 없으니 앞으로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그건 오빠가 원하는 대로, 오빠가 편한 대로 알아서 해.”

남편의 마음이 괴로울 듯하여 더 이상 말을 걸지 못했다.

나는 홀가분하게 씁쓸했지만 참담하게 씁쓸할 남편 앞에서 그 홀가분함을 내색하기도 미안했다.

읽다 말았던 성경이나 마저 읽으려고 성경을 펼쳤다.

그런데 우연히 펼쳐 눈에 보인 구절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왜 하필.

바로 지금.

이 시점에?

나는 하늘이 인정해주는 종살이를 했던 것인가?

하늘이 내려 준 용심을 가진 시어머니한테서, 그 지긋지긋한 시월드에서 나는 해방되는 것인가?


남편을 불렀다.

“오빠, 내가 지금 성경책 막 아무 데나 펴는 거 오빠도 봤지?”

“어. 왜?”

“하필 눈에 보인 부분이....”

나는 큰 소리로 그 구절을 읽어주었다. 남편의 얼굴이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모르게 일그러졌다.

“미안해.”

남편의 그 말이 “철컥” 하며 무겁고 힘겨웠던 시월드라는 족쇄를 내 발목에서 풀어주었다.


나는 이제 자유다!

나는 이제 시어머니가 없다!

나는 이제 과거 남자를 캐물을 시어머니가 없다!

나는 이제 카톡 프로필까지 간섭하며 잔소리할 시어머니가 없다!

나는 이제 내 아이에게 엄마가 남자랑 통화하는지 감시하라는 시어머니가 없다!

나는 이제 시아버지 앞에서 내 신체 부위를 조롱하며 낄낄거릴 시어머니가 없다!

나는 이제 네 남편이 외로우니 아이랑 너무 다정하게 지내지 말라고 할 시어머니가 없다!

나는 이제 시도 때도 없이 불러내 아프든 말든 혹독한 일을 시키며 폭언을 퍼붓고 학대할 시어머니가 없다!

나는 이제 잘하나 못하나 지켜보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친구들을 불러와 싹 뒤집어엎을 거라고 협박하는 시어머니가 없다!

나는 이제 본인은 사사건건 간섭하면서 친정에서 간섭하는 건 이혼 사유라며 내가 내 엄마와 연락하는 것도, 친정에 가는 것도 눈치를 주는 시어머니가 없다!

나는 이제 며느리가 아니다!


“팡!”, “팡!”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졌다.

화려한 불꽃이 그린 글자가 축하 메시지를 날린다.

경축!

며느리 탈출!!


대한민국에서 며느리가 아니라는 사실이 이렇게 행복한 일이었다니!

앞으로 절대 누군가의 며느리도 되지 않겠다고 결심하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남편한테 미안해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웃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자유다!


드디어,

‘며느리’님이 ‘시월드에서 살아남기’ 게임을 종료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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