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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샘 Feb 13. 2020

용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상하게 오른쪽 아랫배가 묵직하고 불편했다. 병원에 갔더니 혹이 생겼단다. 의사가 나를 보며 물었다.

“무슨 스트레스받는 일 있었어요?”

“아, 네. 뭐.. 그렇죠. 스트레스 안 받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수술해야 할 것 같아요.”

“네?”

“혹이 있는데 너무 크네요. 수술 날짜를 잡읍시다.”


수술 통보를 받은 주 토요일에 아랫배의 통증이 더 심했다. 생리통도 시작되고 오른쪽 아랫배는 찌르는 것 같기도 하고 묵직하게 누르는 것 같기도 한 불쾌한 통증이 계속되었다. 도저히 수업을 못 할 듯하여 휴강을 하고 누웠다. 남편은 출근을 하고 나는 종일 누워있자니 하루 종일 방치된 아이가 저녁 무렵엔 울면서 발버둥을 친다.

“심심하다고! 놀러 나가고 싶다고!”

“엄마가 아프잖아.”

“그래도 심심하단 말이야!”

때마침 전화가 울리고 아이 친구의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언니, 뭐해요?”

“아, 몸이 안 좋아서 좀 누워있는데 애가 하도 심심하다고 보채서 지금 놀이터라도 가야 하나 고민 중이야.”

“우리 애들도 심심하다고 해서 나가려고요. 언니, 그럼 내가 키즈카페라도 데리고 가서 봐줄 테니까 좀 잘래요?”

“아니, 하루 종일 애 방치하고 잤어. 그리고 미안해서 어떻게 애만 맡겨. 혼자서 애 셋 보려면 힘들잖아. 아침보다는 좀 나아졌으니 같이 가지 뭐.”

나가려고 준비하는 사이에 시아버지에게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나는 서둘러 나가는 중이라 남편에게 연락드려보라고 문자를 남겼다. 남편은 시가에서 급하게 불러 가본다며 재미있게 놀다 오라고 했다. 아이를 친구와 놀리다가 돌아오니 남편은 늦을 것 같다며 먼저 자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언제 왔는지도 모를 남편이 옆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언제 왔어?”

“5시.”

“새벽?”

“응.”

“오늘 김장하러 오라고 하셨어.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 늦는다고 또 화내실라.”

“끝났어.”

“뭐가?

“김장.”

“뭐? 김장이 끝났다고?”

“응.”

“정말? 이상하네. 며느리 없이 하실 양반이 아닌데. 그럼 나 안 가도 돼?”

“응. 전화나 한 번 드려.”

“아, 다행이다. 안 그래도 컨디션도 안 좋고 내일 수업도 너무 많아서 오늘 김장하고 내일 수업 어떻게 가나 걱정했는데. 근데 정말 어머니가 나를 안 부르고 김장을 하셨다고?”

“응.”

‘수술 앞두고 아파야 그놈의 김장을 면제해주시는 건가? 아들들은 못하게 해도 며느리는 꼭 부려먹어야 하는 분인데.’

라고 생각하며 신랑에게 확인을 했다.

“뭐라고 말씀드렸는데? 나는 아파서 못 오는 거라고 말씀드렸어?”

“아니, 놀러 갔다고 했어.”

“뭐?! 그렇게 말씀드리면 어떻게 해!”

“그게 왜! 네가 놀러를 갔다 해도 엄마는 할 말이 없지. 미리 약속했던 것도 아니고 갑자기 불러낸 건데.”


아,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편 방패를 사용하여 김장 전투에 입장해 있었다. 남편은 합리적인 사람이지만 자기 엄마는 몰랐다.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밤새 부려먹고 싶었던 건데 대신 본인 아들을 부려먹게 되었으니 얼마나 이를 갈고 있을까?

나는 곧 불어올 폭풍을 직감했다. 불안했다. 너무 불안했지만 대체 무엇을 불안해해야 하는 것인지 몰랐다. 아니 알았다. 시어머니는 나를 죽이려 할 것이다. 차라리 모르는 척 하자. 아니 진짜로 몰랐지. 사람을 갑자기 불러내 밤새도록 일을 시키려는 계획을 짜고 있었는지 내가 어찌 알겠어. 극도의 불안한 마음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어머니, 지금 갈까요?”

“왜!”

역시나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차가운 북풍이 분다.

“오늘 김장하러 오라고 하셨잖아요.”

“네 남편이랑 내가 다 했다!”

“끝났다고요? 다 끝난 거예요? 그럼 이제 더 할 거 없어요?”

“통 보면 모르냐!!!”

“무슨 통이요?”

“김치 담아서 가져갔잖아!!!”

“아, 오빠가 김치냉장고에 넣어놨나 보네요. 못 봐서 몰랐어요.”

“니가 안 왔으니까 모르지!!!!!!”

어머니의 비명에서 살기가 느껴진다.


하늘이 내린 시어머니의 용심이 하늘보다 더 새파랗게 나를 질리게 했다.

‘내가 또 시어머니의 저 살기 어린 비명을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는 걸까?

예측할 수 없는 저 심술을 또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는 걸까?

그런데 이번에는 그러기 싫다.’


시어머니가 한 번씩 폭풍을 일으켜 모멸감으로 나를 흠뻑 적시면, 잊으려 노력했던 과거의 모든 기억까지 귀신같이 소환되었다. 그러면 나는 십 년 전 일까지 모든 사건들을 상기하며 하나하나 다시 용서해야 했다. 시어머니를 용서하고, 남편을 용서하고, 시동생을 용서하고, 시아버지를 용서하고, 결국 나를 용서해야 했다. 모두를 용서하기 위해 제발 시어머니를 뛰어넘게 해 달라고, 시어머니보다 더 큰 그릇이 되게 해달라고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는 기도를 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도 용서하고 싶지 않다.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지? 내가 이렇게 살려고 결혼을 한 게 아닌데... 발랄하고 당차게 삶을 꿈꾸던 나는 어디 가고 시어머니 구박에 주눅 든 나만 있는 거지?

나는 왜 수술을 앞두고 있다고, 아프다고, 내일 수업도 많다고, 그래서 갈 수 없다고 말을 못 하는 거지?

오빠가 나한테 말도 안 해서 밤새 김장을 하는 줄도 몰랐다고, 알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갈 수 없다고, 나를 그렇게 혹독하게 부려먹어서는 안 된다고 왜 말을 못 하지?

내가 학대받는 것에 길들여진 것일까?

어떻게든 여기에서 벗어나야 해. 여기에서 당장 빠져나가야 해. 모두 벌을 받아야 해. 이번에는 아무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 이런 일은 그 누구도 겪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걸 모두 알아야 해!’


나는 이제 용서가 아닌 다른 선택을 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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