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사줄 책을 추천해달라는 친구에게
친구에게 카톡이 왔다. 꽤나 스마트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오랜 친구다. 딸에게 전집을 사주고 싶은데 추천 좀 해달란다. 잘못 고를까봐 걱정이 된단다. 학부모들에게도 종종 책을 추천해달라는 문의를 받는다. 사연도 다양하다. ‘학교 숙제가 이러쿵 저러쿵한데 거기에 맞는 책이 뭘까요?’부터 ‘아이가 의대를 준비하는데 의료에 관련된 인권에 대한 책이 있나요?’를 비롯해 ‘자기소개서에 인생의 책을 써야하는데 인생의 책이 될 만한 책 좀 추천해주세요’ 까지.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보면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책들에 깔려죽을까봐 공포심이 느껴질 지경이다. 저렇게 많은 책들을 만들어 내는데 지구에 아직도 나무가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그러니 그 많은 책들 속에서 어떤 책을 어떻게 골라야 할지 막막하고 어려운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책을 파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치밀하고 집요한지 그 방법도 참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아이가 유치원생 무렵 아이 친구 엄마가 무슨 육아 강좌가 있다며 함께 가보자 하여 아이를 데리고 쫄래쫄래 따라가 본 적이 있다. 엄마의 육아유형을 테스트해보고 엄마와 아이의 성향에 맞는 육아 방법을 지도해준다나 뭐라나. 정말 30분간 다양한 질문을 하며 면밀하게 나의 육아 태도에 대해 질문했다. 테스트 결과는 이러했다. 나는 주양육자로서 아이아빠와 육아를 도와주는 주변인들에게 높은 신뢰를 형성하고 있고 육아 만족도가 아주 높다고 한다. 이렇게 높은 점수가 나온 것은 자기들도 처음 본다며 나를 치켜세웠다. 그들이 태운 비행기를 타고 나는 하늘을 날았다. ‘와, 나 엄청 잘하고 있나봐. 남편한테 자랑해야겠어!’ 라고 생각하며. 하지만 그들은 곧 나를 땅에 곤두박질 시켰다. 주양육자인 내가 아이에게 필요하다고 하면 아이 아빠도 선뜻 그리하라 할테니 300만원짜리 전집을 들이라는 것이었다. 상상도 못했던 ‘기승전책사라’에 나는 박장대소를 하며 이렇게 답했다.
“300만원을 써서 그 신뢰를 버리라는 건가요? 지금 저희는 300만원도 없지만 그렇게 많은 책을 둘 공간도 없어요. 집이 무척 좁거든요. 남편이 제 판단을 전적으로 믿고 지지하는 것은 제가 그런 대책없는 충동구매를 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남편이 저를 믿는다는 걸 이용해서 상의도 없이 300만원씩이나 하는 전집을 덜컥 사온다면 앞으로 저를 믿을 수 있겠어요? 입장 바꿔 남편이 그런 짓을 하면 저는 남편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어느 출판사 판매원이 아이에게 명작동화 전집을 사주라며 이렇게 홍보한 적도 있다.
"우리 책은 다른 출판사와 다르게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유가 나와있어요. 다른 책들은 헨젤과 그레텔이 왜 버려졌는지 안나오지만 우리 책엔 나옵니다. 가난해서 버려졌다고요."
그래서 내가 물었다.
"이유가 나온 책을 읽으면 뭐가 더 좋은가요?"
"네?!"
"이유가 나온 책을 읽은 아이들과 이유가 안나온 책을 읽은 아이들의 반응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아이들이 어떤 영향을 받는데요?"
그 판매원이 얼굴까지 벌게지며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하니 물어본 내가 더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냥 내가 대답했다.
"이유가 안나온 책을 읽은 아이들이 그 이유를 궁금해한다면 상상력을 키울테고, 이유가 나온 책을 읽은 아이들이 그 이유가 타당한지 고민해본다면 비판력을 키우겠죠. 결국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하느냐,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 판매원은 책 팔기는 포기한 눈빛으로 민망함을 감추는 웃음을 지으며 내 직업을 물었다. 하핫. 그녀의 물음은 날카롭다. 내가 했던 대답이 바로 내 직업이다. 아이들과 책을 읽고 궁금증을 찾고 토론하는 것. 그래서 상상력도 키우고, 비판력도 키우고, 결국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것. 그런 직업을 가진 자에게 어떤 책을 읽혀야 하냐고, 어떤 책을 사줘야 하냐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나올지 사실 그려지지 않는가? 너무 뻔해서 싱거운 대답이 될 수도 있겠지만, 책을 고를 때 나는 이런 기준으로 고른다.
아이들도 자기 나름의 취향이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체와 분야의 책을 스스로 고르도록 하는 것이 좋다. 글밥이 자기 수준에 비해 너무 많으면 되려 질려 할 수 있다. 아이가 원하는, 아이 수준에 맞는 컨텐츠를 찾아야 한다. 그러면 항상 만화만 고른다고 걱정하시는 어머니들이 많다. 그러면 만화는 만화대로 혼자 보라고 하고 아이가 좋아하는 분야의 글밥이 좀 있는 책을 골라 부모가 직접 읽어주며 함께 보는 것이 좋다. 책을 읽어주며 아이가 묻는 질문으로 함께 생각을 나눈다면 금상첨화다. 책에 대해 유쾌하고 행복한 경험을 한 아이들은 책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더 쉽게, 더 자주 접근한다.
요즘 어린이책들 참 잘 나온다. 전 세계의 수 많은 작가들이 다양한 스타일의 그림과 이야기로 재미있고 유익한 책을 만들어낸다. 너무 많은 양의 전집을 한꺼번에 구매하는 것만 아니라면 소량의 책을 이것저것 사보며 이런저런 실패를 해보는 것도 좋다. 이미 우리는 정보가 차고도 넘치는 세상을 살고 있지 않은가? 새로운 정보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만 제공하는 것으로도 나는 실패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아이에게 커다란 세계사 그림책을 한 권 사준 적이 있다. 배송된 책을 보고 나는 당황했다. 아이가 좋아할 만한 그림과 내용이라고 짐작했는데 아이도 나도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아이는 그 책의 딱 한 줄에 꽂혔다. 자기가 처음 보는 내용의 딱 한 줄. 그 한 줄에 대해 질문하고 관련된 정보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고, 동영상을 찾아보고 하면서 아이는 책 한 권 분량 이상의 지식을 접하게 되었다. 다만 그 책은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새로운 것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스러워 졌다. 그 책은 실패인가? 결국, ‘어떤 책인가’ 보다 ‘책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다. 그러니 책을 고르는데 실패할까봐 걱정하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실패하면서 방법을 배워야 정보를 선택하고 비판하며 판단하는 능력, 정보를 활용하는 능력을 갖게 된다. 그런 능력을 가진 자가 진정한 미래의 인재가 아닐까?
경제적인 능력이 충분하여 몇 백 만원짜리 전집을 고민없이 한방에 사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힘들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전집을 덜컥 사는게 딱히 좋은 것도 아니다. 본 투 비 책벌레가 아니라면 그 많은 책을 다 보기도 힘들 뿐더러 엄청난 분량에 미리 질리거나 책장에 꽂힌 것만 익숙해져 호기심이 오히려 반감하기 쉽다.
무엇보다 사람은 돈을 쓴 만큼 이득을 보고자 하는 욕망을 억누르기 어렵다. 부모가 자신의 능력보다 과하게 지출하면 자꾸 아이한테 본전을 찾으려 한다. 부모의 그 욕심은 아이를 잡는 잔소리를 만들고 아이는 책에서 더 멀어지니 결국 후회만 남는다. 그래서 나는 책을 살 때 -특히 내가 잘 모르는 책을 살 때- 실패를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금액만 쓴다.
혹시 누군가 ‘나는 그 욕망을 역이용해 본전을 찾고자 목이 찢어지도록 아이에게 다 읽어줄 의지가 있으므로 몇 백만원이 아깝지 않다’라고 한다면, GOOD! 몇 백이 아니라 몇 천만원도 아깝지 않다.
책을 추천해달라는 친구에게 위와 같은 잔소리만 주절주절 길게도 늘어놓았다.
“O.K. 그러니까 뭐가 됐든 꽝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이랑 같이 하라는 거지? 네 말을 들으니까 부담은 사라진다.”
역시 스마트하고 군더더기 없는 친구답다. 나의 개떡같은 잔소리를 찰떡같이 알아듣고 한방에 정리한다.
그렇다.
아이에게 책을 사주고, 함께 읽을 생각을 했는가?
그렇다면 꽝은 없다.
그러니 아이와 함께 즐겨라.
마음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