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최초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 이 영화에 기생충은 등장하지 않는다. 기생하여 연명하는, 자생 의지를 내려놓고 햇볕 쬐기를 포기한 채 자족하는 비루한 존재는 있지만, 그를 '충'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게 감독의 의도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그런 무기력한 존재를 바라보는 제삼자의 시선, 그 감정이 바로 이 영화의 주제와 가깝다. 그 감정은 '혐오'다. (혐오 嫌惡 : 어떠한 것을 불결함 등의 이유로 싫어하거나 기피하는 감정)
전반부는 마치 잘 짜인 사기극처럼 발랄하다. 자수성가한 박사장(이선균)의 정원이 있는 삼층집이 나오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계단을 지나면 드러나는 초록 정원과 햇빛. 밝고 구김 없는 공간이 마치 그들 인양, 저절로 호의가 생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집은 대문에서 현관, 현관에서 거실, 거실에서 이 가족이 생활하는 2층 침실까지 줄줄이 계단으로 이어진다. 어딘지 불편하고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감정, 이것이 스타트다. 그러나 영화의 전반부 김기사(송강호)의 가족들은 이 계단을 기선 제압한 듯 사뿐히 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김기사의 실제 집은 반지하. 와이파이도 햇볕도 간신히 일시적으로 찾아드는, 노상 방뇨하는 취객을 어찌할 수 없이 올려봐야 하는, 화장실 변기조차 계단으로 올라야 하는, 곰팡내 진동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김기사와 아내, 자식들은 어딘지 궁핍하고 풀 죽어 있었지만, 박사장네에선 당당하고 그럴듯해 보인다.
극을 반으로 뚝 자르듯 등장하는 천둥번개 치는 밤. 정주행 하던 테이프가 역으로 되감기듯 심상찮은 기운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에게서 시작된다. 이어지는 새로운 공간, 새로운 인물. 이제부터 모든 것이 드러난다.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서 우리는, 숨겨진 것들과 마주하며 충격과 공포, 불쾌감과 모멸감을 함께 느낀다. 어떻게 그럴 수가... 남의 일처럼 선을 긋다가, 왠지 모를 연민과 슬픔이 일고, 일상 시계 속에서 스치듯 지나간 현실 속 우리들의 여러 순간이 떠오른다.
영민한 감독은 후반부에 가서야 이 감정이 무엇인지 제대로 꺼내어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그들의 이야기가 정말 그들의 이야기일 뿐일까,라고.
박사장은 김기사를 선을 넘지 않는 적당한 존재로 여기면서도 뭔가 섞이기 싫은 거리낌이 든다. 내색하지 않으려 하지만 결국 들켜버리는 그 감정은 계층이란 피상적 언어 뒤에 숨은 우리 사회의 진짜 얼굴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그제야 이 영화의 제목을 떠올리게 한다.
경제적으로 실패한 가장은 지하로 숨어들고, 숨어든 공간에서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지는 만큼 의지도 소멸된다. 어느새 자신과 다른 성공한 박 사장들을 찬양하기까지 하면서 비루해지는 자신을 외면해버리는 그들. 그런 아버지를 지켜보는 아들이 '돈'을 부르짖는 것은 구원과 탈출을 오직 돈에서밖에 찾지 못한 서글픈 절규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될까, 그 얘기를 하고팠던 걸까. 에이, 여기가 다 그렇잖아, 알면서. 마치 그렇게 끝내는 듯한 엔딩이 서글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