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제가 궁금해서 여쭤보는 건데 왜 마이솔은 안하세요? 아쉬탕가를 이 정도 수련하셨으면 충분히 마이솔을 해나가실 수 있어요. 전 요가 수련의 궁극적인 목표는 독립과 자기 수련이라고 생각해요."
힘겹게 아쉬탕가 수련을 마치고 땀으로 범벅된 채 마무리로 사바아사나의 달콤함을 누리려던 찰나 원장님의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든다. 마이솔이 뭔지 정확히 모르겠다, 수련 시간이 안맞는다 등등 의견이 나왔는데 나도 사실 그랬다. 어렴풋이 마이솔은 숙련자만 가능한 자율 학습 정도로 알고 있었던 터라 아예 시도할 생각조차 못했던 것.
지도자는 있지만 별도의 구령 없이 각자의 속도와 그날의 컨디션대로 온전히 혼자 아쉬탕가 시퀀스를 수련하는 마이솔을 내가? 덜컥 겁부터 난다. 요가 수련을 한지 몇 년이 되었고 아쉬탕가 수련을 하면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도 느끼면서도 정말 오롯이 혼자 매트에 서서 스스로 순서를 기억하면서 해나가며 부족한 부분을 더 깊이 살핀다 생각하면 말 그래도 눈앞이 캄캄해진다.
관계 중심적인 데다 인정 욕구가 강한 난 무언가를 배울 때면 늘 선생님이 중요했고 솔직히 말하면 좋은 선생님을 찾아 그분의 조언을 듣고 빠르게 습득하는 방식을 선호해왔다.
요가도 마찬가지. 원장님과 요가 수련한 지 4년이 넘었고 요가원에 여러 선생님이 계시지만 난 주로 원장님과 내가 좋아하는 다른 선생님과만 수련을 한다. 그렇다, 농담처럼 원장님께도 고백했듯 난 원장님을 통해서만 요가를 배우고 수련한 원장님 요가 베이비인 것.
며칠 전 존스홉신스 소아정신과 교수인 지나영 교수의 자녀 양육에 관한 이야기 중 가장 중요한 건 인생을 항해로 비유했을 때 아이가 스무 살 이후 자기 배의 선장이 될 수 있게 도와야 한다는 말이 와닿았다. 좁은 배에 끝까지 아이를 함께 태우고 갈 생각이냐고, 만약 이 아이가 연습 없이 혼자 본인 배에 타야만 한다면 얼마나 두렵겠냐고.
아직 미성년자인 아이뿐 아니라 그런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부모이자 생물학적, 사회적 기준에서 진작 어른이 된 나 자신은 어떤 선장인가 자문하게 된다.
어른의 기준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심리적, 물질적 독립 아닐까? 전업 주부가 된 이후로 안그래도 한 번씩 결국 경제적 독립을 이루지 못한 데 자존심이 상하는데 더구나 그 보상을 자꾸 다른 가족들의 인정에서 찾으려 하니 정신적으로도 과연 내가 진정한 어른인지 자신이 없어진다.
솔직히 원장님의 구령에 맞춰 최선을 다하는 시키는 대로 하는 게 편하고 익숙했다. 수련 중 원장님이 나에게 관심을 갖고 조금이라도 잡아 주시거나 조언을 해주시면 그게 또 그렇게 좋았다. 반면 원장님이 그날 나에게 관심이 덜하거나 눈 한번 마주치지 못했을 땐 묘하게 실망스러웠다.
한 때 필라테스를 해본 적도 있지만 난 기구가 내 영역을 침범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내가 할 수 없는 걸 떠밀려서 해야 하는 것 같은 기분이 싫었다. 매트 요가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 매트 한 장 안에서는 내가 오롯이 나구나 하는 해방감이 들었다. 잘하든 못하든 이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육체와 정신의 변화를 보는 것이 행복했다.
이제 보니 그 해방감은 사실 반 즈음 이룬 것이었다. 어쩌면 해방이 아니라 또 다른 관계에 의지하고 의존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삼자 대면이나 다자 대면에 익숙한 내가 온전히 나와 양자대면해야 하는 것은 조금 두렵다. 나의 가장 밑바닥을 직시해야 한다는 공포가 여전히 있다.
원장님께서 시간 문제가 있을 거라곤 생각을 못하셨다며 스케줄 조정을 해보겠다고 하셨다. 마이솔을 생각하면 머릿속이 하얗게 되지만 이 두려움을 이겨내고 한 발 내디뎌 보는 것부터가 진정한 어른이 되어가는 거겠지. 완전한 매트 독립을 이루는 그날까지 이번 주도 나마스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