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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ainJ Sep 08. 2021

화장실 청소 대전

주부 생활 13년 차 즈음되니 웬만한 집안일엔 나름의 요령이 생겼지만 여전히 가장 힘든 게 화장실 청소다. 아주 최근까지 이 문제는 우리 부부 싸움의 단골 주제였다. 다툼이라기보다 일방적인 나의 짜증에 가까웠지만.


아이와 손님용으로 사용하는 거실 화장실은 그나마 괜찮았다. 거의 건식으로 잠깐씩 사용하는 게 다였기 때문에 한 번씩 수전을 닦아주고 눈에 보일 때마다 정리를 해주는 선에서 어느 정도 깨끗하게 관리가 되었다. 문제는 나와 남편 둘이 사용하는 안방 화장실이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가지만 남편은 수전에 낀 물 때며 타일에 낀 곰팡이가 늘 보이지 않거나 화장실 청소를 하기엔 허리가 아프다 했다. 나는 가뜩이나 창이 없어 환기가 어려운 공간의 특성상 금세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잘 생기는데 아침, 저녁 성인 두 명이 몇 번씩 머리 감고 샤워한 흔적들로 가득한 그곳에 들어서면 신경질부터 났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결국 먼저 나서는 건 대부분 나였다. 남편에게 유무언의 압박을 가하며 미루다 못 견디고 몇 주만에 마지못해 장갑을 낀다. 자잘한 세면 용품들을 모조리 꺼내고 변기에 락스를 뿌리고 솔로 안쪽을 구석구석 닦아주는 것부터 시작한다. 가장 자주 사용하는 수전과 세면대를 틈새 솔을 이용해 닦고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샤워 부스 안까지 구석구석 닦아낸다. 청소를 자주 안 하니 시간도 오래 걸리고 약품을 사용하지 않으면 깨끗하게 닦기가 쉽지 않다. 역한 락스 냄새가 진동하는 좁고 습한 곳에 쪼그려 앉아 시큰거리는 손목으로 타일 바닥을 문지르고 끝도 없이 나오는 하수구 머리카락을 빼고 있자니 갑자기 나 자신이 처량해진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자괴감이 마구 피어오른다. 화장실은 가족 모두 사용하는 공간인데 왜 나만 이렇게 가장 더러운 걸 만지고 역한 냄새 맡으며 청소하고 광을 내지? 이건 집에 있는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가?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하다 청소를 마칠 때 즈음이 되면 약품 냄새에 두통도 생기고 몸도 마음도 방전되고 만다. 그런 날 저녁이면 아내에게 화장실 청소를 시킨 적은 없지만(심지어 화장실 청소를 한 줄도 모르는) 남편에게 모든 화살이 쏠린다. 성격이 무던한 남편이 그럼 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맘 편한 소리를 덧붙이기라도 하는 날엔 그야말로 뒷 일을 장담할 수 없다. 이런 패턴이 무한 반복이었다.


사실 남편이 허리 때문에 일 년 가까이 크게 고생했고 그 후로도 좋지 않은 게 사실인 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다른 방법이 없단 걸 알고 있다. 아이에게 우리 둘이 사용하는 화장실 청소를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단지 화장실 때문에 크지도 않은 집 청소를 다른 분께 맡기고 싶지도 않다. 영국에서 화장실이 위아래 세 개였고 아이가 어렸을 때 일주일에 한 번씩 청소를 맡긴 적이 있었는데 돈도 물론이거니와 우리 집 치부를 다른 사람에게 모두 보여주는 기분이 그리 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래저래 화장실 청소는 내가 해야 한다는 결론. 이 사실을 받아들인 게 최근이고 대신 요즈음 최대한 즐겁게 청소하는 법을 궁리 중이다. 유튜브나 블로그 정리 달인들의 노하우를 열심히 새겨보고 새롭고 편리한 청소 도구들은 없는지 틈틈이 검색도 해본다. 냄새가 독하지 않으면서 세정력은 있고 무엇보다 욕실에 두어도 눈에 거슬리지 않는 예쁜 패키지의 세제를 구비한다. 남편에게도 평소 화장실을 사용하고 나선 꼭 스퀴지로 바닥 정리는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도 너무 더러워지기 전에 자주 사용하는 수전과 변기는 틈나는 대로 닦는다. 전체 청소는 2주에 한번 정도 한다. 그러면 아주 반짝반짝하진 않아도 눈에 크게 거슬리지는 않는 화장실이 어느 정도 유지된다. 비로소 최악으로 치닫던 우리 화장실도 내 마음도 안정을 찾아가는 중이다.


부끄럽지만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생각해보게 되었다. 화장실 청소는 왜 결혼하고 나서야 유달리 힘들어졌는가에 대해. 분명히 결혼 전 동생과 둘이 오피스텔에 산 적도 있었는데 청소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한 걸 보면 우리 집엔 눈에 보이지 않는 화장실 청소 요정 혹은 우렁각시가 있었던 것이었다. 화장실은 내가 깨끗이 사용하여 깨끗한 줄만 알았던 철부지 시절을 그렇게 오래도 누리며 살았다니. 지금까지도 깨닫지 못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또 당연하게 부모님께 받았을까 싶어 미안해진다.


자기 화장실 청소는 스스로 할 줄 아는 사람이 돼보려 한다. 이것은 집안 내 성평등 문제나 전업 주부의 자존감 문제이기 전에 한 인간의 독립성과 관련된 일이다. 물론 화장실 청소에서 인간의 독립성까지 나가는 건 비약일 수 있고 개인에 따라 화장실 청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한다. 특히 안방 화장실은 지극히 개인의 영역이고 더럽게 방치한다 한들 본인만 괜찮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난 다만 드러나지 않는 곳도 돌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내 몸만 깨끗하게 빠져나오는 게 아니라 매일 하루의 시작과 마무리를 하는 데 중요한 공간이니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책임감을 갖고 싶다. 조금 더 궁극적으로는 우리 집 화장실에서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할 환경까지 나아가는 책임 의식이었으면 한다. 화장실 청소 문제는 뜻밖에 이렇게 심오하고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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