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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gapeolive Jun 29. 2017

3. 독학 영어로 생방송하게 되기까지

영어와의 첫 만남 2

영어와의 첫 만남 2




쉼 없이 달려온 의대 생활, 학점은 언제나 저공비행이었다. 의과대학은 거의 대부분 입학 전에 고등학교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모인다. 그러다 보니 의대에서 시험을 볼 때 석차가 나오면 많은 학생들이 적지 않은 충격을 받게 된다. 그리고 간혹 좌절에 빠지거나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을 보게 된다. 하지만, 중간 이하의 성적은 나에겐 그리 큰 충격은 아니었다. 초, 중, 고등학교를 통틀어 학급에서 중간 이상을 한 적이 별로 없기에, 기대했던 성적보다 낮게 나온 나의 평점은 나를 아주 조금만 놀라게 할 뿐 그리 커다란 충격을 주지는 못하였다. 단지 나에게 가장 충격적이고 좌절에 빠지게 하는 것은 방학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의대에서는 어느 과목 하나라도 점수가 좋지 않으면, 바로 유급(drop out)을 시킨다. 즉, 윗 학년으로 진급하지 못하게 되고, 같은 학년에 남아 본인보다 학번이 낮은 후배들과 같은 공부를 하게 되고, 기준 점수를 획득하지 못한 바로 그 한 과목 때문에 전과목을 다시 수강하여 들어야 한다. 그리고 남자의 경우 나이가 들고 몇 번의 유급을 하게 되면, 군대를 가야 한다. 이경우 인생에 커다란 변화를 줄 수 있기에 유급 이전에 '재시험'이라는 기회가 주어지는데 바로 그 재 시험 때문에 나의 방학은 언제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니 방학이 있긴 있었으나 2주 정도의 방학이었다.  



어려서부터 아토피로 고생을 많이 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언제나 알레르기 문제로 (such as allergic dermatitis, allergic rhinitis, hay fever, etc) 병원을 자주 들락날락했으며, 고등학교 1학년 때에는 심한 축농중으로 "칼드웰 수술(Caldwell-Luc Operation)"을 받았었다. 이 수술은 지금에는 의학의 발전 및 수술도구의 발전으로 현재 시행되지 않는 오래된 수술법으로 상악동을 열어서 농을 제거하는 수술이다. 당시의 기억은 마치 수용소에서 고문을 당하는 것과 같았는데, 잠시 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하자면, 우선 전신마취가 아니라, 국소마취로 하는 수술로 수술대에 눞혀진뒤 눈가림을 당하고 손발이 묶인 채 얼굴에 수많은 마취 주사를 놓는다. 그리고 드릴과 망치질, 그리고 뭔가 긁어내는 고통은 절대 잊을 수 없는 나의 기억이자 지금 환자를 보는데 환자의 마음을 조금 더 이해하게 하는 하나의 밑거름 역할을 해준다.  그 뒤 또 하나의 큰 수술을 받았는데, 이는 복막염 때문이었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어느 날 갑자기 배가 살살 아파왔다. 개인병원 내과에 가서 장염이라는 진단하에 집에서 요양 중이었는데, 나의 복통은 나아지지 않고, 점점 심해 지기 시작했다. 당시 내과 선생님의 말에 집에서 요양하라고 해서, 죽을 먹으며 지냈는데, 배가 점점 더 아파오고, 열이 심하게 나서 새벽 4시경 끙끙 앓는 나를 발견한 어머니가 택시를 불러 대학병원 응급실에 가서 맹장이 터져서 복막염으로 발전한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 뒤 수술을 받았으며, 내 배의 우측 하단에는 일자로 약 10센티의 상처를 남겨주었다. 당시 나는 내과 선생님이 오진을 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의사가 되고 보니 맹장염은 초기에 상복부 동통이 오고, 추후 우측 하단으로 통증이 옮겨 가는 것으로 초기에는 진단이 어렵고, 막상 정확한 진단은 배를 열어봐야 안다는 것을 알았다.  


여하간 이런저런 질병과 수술을 겪으면서, 그리고 가까스로 의과대학을 졸업했지만, 의사가 되어 환자를 위해 헌신하고자 했던 나의 의욕을 필자는 내신 1등급으로 평가하고 싶다. 그래서인지, 진정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그런 만능 의사가 되고자 했었다. 신경과 전공의 시절, 응급실 당직 때에는 가능한 많은 신경과 환자를 입원시키려 했었다. 그런 가운데 심지어는 신경과에서 안 봐도 되는 그런 환자들까지 입원시켰었다. 물론 지금에서야 느끼는 것은 내가 볼 수 없는 환자를 보는 것은 교만이자, 매우 위험한 의료행위이며, 진정 환자를 위하는 것이 아님을 안다. 하지만, 당시 의욕과 열정에 사로잡힌 나는 병원에서 "유비무환(비나 내리는 날은 환자가 없다)"라는 법칙도 통하지 않는 "환타(환자 타는 사람)"로 유명했었다.  응급실로 밀려오는 환자들, 생사를 오가는 중환자실에서의 오는 삐삐 소리(삐삐: 스마트폰 이전에 사용한 연락 도구), 늦어지는 회진, 곳곳에 드러나는 나의 펑크 (실수)들, 그리고 윗년차 및 교수님들로 부터의 질책과 발표 숙제들, 그러다 보면 주중에 어쩌다 한번 있는 off 날도 퇴근을 밤 9시나 10시에 하고 다음날 아침 6시에 출근하게 되는 일이 일상이 되어갔다. 그리고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 어느덧 나에게도 고년차의 시절이 다가왔다. 점점 쉴 수 있는 날이 늘어나고, 그런 가운데, 나는 지금의 아내인 당시 여자 친구를 만나 서울시내를 돌아다니게 되었다. 우리는 걷는 것을 좋아했다. 한참을 걷다 보면, 나는 나도 모르게 너무나 많이 변한 도시, 곧곧에 들어선 빌딩, 그리고 새롭게 단장된 도로며 거리를 멍하니 넉나간 사람처럼 쳐다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서울 촌놈 행세한다면, 면박을 주던 와이프의 추억이 생각난다.



의사들에게 공중보건의(이하 '공보의'라고 하겠다)로서의 생활은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휴가다운 첫 휴가라고 한다. 쉼 없이 달려온 6년의 의대 생활, 졸업 후 5년간의 인턴 및 전공의 수료기간, 그리고 찾아온 여유, 그게 바로 공중보건의 시절이다. 또한 이러한 공중보건의의 생활은 휴가다운 휴가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휴가라고도 한다. 그 이유는 복무기간을 마치고 나서 개원의가 되면, 평일 밤늦게까지 진료실을 열고, 토요일도 오후 늦게까지 진료를 해야 하기 때문이고, 대학병원에 있다면, 끊임없이 논문 발표, 교육, 진료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공보의를 하기 앞서, 많은 의사들은 설렘과 기대를 갖게 되고, 공보의 생활을 아쉬워하며, 떠나는 많은 선배들은 아쉬움과 함께 후배들에게 자신의 경험담과 어떻게 지내라는 조언을 해주게 된다.  나 또한 주변으로부터 공보의 생활에 대해 여러 가지 조언, 자신들의 경험담을 듣게 되었다. 그들 중 가장 많이 들었던 내용을 잠시 적자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이니, 열심히 놀고, 열심히 즐겨라"

"골프 연습해서 머리 올리고, 실력 쌓고 나와라"

"연애 열심히 하고 좋은 추억 만들어라" 등등...


신경과 의사는 환자의 생체리듬 (Vital Sign)이 흔들리는 위중환 환자들 및 의식저하를 보이는 환자들을 봐야 한다. 그러다 보면 그들의 마지막을 함께 하는 경우가 많게 되는 데 이는 나에게 큰 축복 중 하나이다. 대부분 그들의 삶을 보면, 인생에서 마지막 종착역에 있는 분들이 많은데, 의사라는 직업을 통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게 되고, 그 들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게 되고, 또한 그들을 통해 간접적인 인생의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중 하나는 나이가 많건 적건 간에 그들의 대부분은 "인생 참 짧고 금방이다" "허무하다"라는 것이다. 이는 나이가 드신 분일 수록 더욱 그러하다. 지금은 과학의 발달, 의학의 발달로 평균 수명이 80대를 넘어섰지만,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60을 넘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기에 이전에는 60을 넘어 61일 되면, "환갑"이라는 이름을 붙여 거하게 축하해주고 잔치를 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당시 32살인 나에게 3년이라는 휴가가 주어졌다. 내가 과거에 태어났다면, 30살이 조금 넘은 나이에는 자식들을 많이 보게 되거나, 혹 일찍 장가가서 애를 많이 놓았다면, 며느리나 사위를 볼 수 있는 시기였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잠시 "인생을 마무리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갔다. '나도 과거에 인간의 수명이 40살 전후의 시기에 태어났었다면, 지금의 내 나이는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 간다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내 인생 역시 참으로 허무하고, 짧고, 그리고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십자가에 33살의 나이에 못밖히신 예수님이라면, 32살의 나이는 1년도 남지 않은 시기일 텐데'라는 생각과 함께... 여하간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이 3년간의 공보의 생활을 뭔가 알차고, 의미 있게 보내고 싶었다. 물론 환자를 보고 의사로서 보람을 찾는 일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나에게 뭔가 도움이 되고, 길이 남을 수 있는 뭔가가 찾고 싶었다. 그런 가운데 "그래 영어공부 한번 해보자"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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