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껏 7월

두 번째

by KAKTUS

1.

그곳에는 폭우가 그쳤는지 안부를 띄운다. 가을날에 떠가는 한 점 구름을 바라보며. 이것은 얼마간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이며, 얼마 즈음은 십 년 간의 칠월에 대한 타이핑이다. 오래 이어진 비가 거짓말 같이 그쳤고 이내 뙤약볕을 몰고 온 폭염이 이어졌다. 강렬한 더위가 이어졌음에도 지구의 축은 어느덧 바람에게서 축축한 습기를 가져갔다. 막, 입추가 지났다.


폭우. 폭염. 폭설. 폭을 앞에 단 글자, 그 계절의 일을 생각하면서 잠시 폭한이라고 썼다 지웠다.

포악함을 저지를 때 쓰는 말, 폭. 폭력에도 그 글자가 있다.


폭한.


매서운 추위에도 폭을 쓰는지? 짧게 읽어보고 폭한이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졌다. 어쩌면 아직 폭한의 영역으로는 진짜 가보지 못했어서 일수도.


계절의 변화는 공기에 닿는 피부가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걸음마다 허공을 휘젓는 팔에 미세하게 공기 입자의 선선함이 스몄다. 이번엔 또 어떤 여름이었는지? 얼마나 잔인하고 또 아름다웠는지.


2.

언젠가부터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천도복숭아가 되었다.


복숭아보다 단단하고, 상큼하며, 단맛에 신맛을 더한 천도복숭아는 갈증을 풀기에도 진 빠진 여름의 피로를 풀기에도 좋았다. 여름이 온다는 것은 천도복숭아가 빨갛게 익어간다는 것이었으며, 무르익은 과즙을 터뜨리는 것으로 여름에 흠뻑 젖을 수 있었다.


천도복숭아는 무른 것이나 단단한 것이나 각자대로 맛있었다. 나는 복숭아를 무는 것으로 여름날의 욕망을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검어질 정도로 빨강이 치달은 흑홍의 욕망. 천도복숭아가 빨간색으로 기억되는 것으로 보면 말이다.


여름에 난 과일 중에서 천도복숭아는 무엇보다 빨갰다. 자두나 사과와는 다른 빨간색과는 달랐다. 검붉게 익은 과일의 맛. 그것이 내겐 여름을 보내는 낙이었다. 무더운 저녁, 하루 온종일 땀에 젖은 몸을 샤워 거품에 씻긴 후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베어 무는 복숭아의 맛은 비길 데가 없었다.


3.

7월에는 대체로 비가 많았다. 태풍은 일렀지만, 폭우가 잦았다. 비가 오래도 퍼붓는 날이면 고향을 가로지르는 천에는 물이 불었다. 집 앞 고수부지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볼이 빨갛던 사춘기 시절, 마음이 왕왕거릴 때 이어폰을 꽂고 온몸에 땀이 솟을 때까지 달리던 장소였다. 개인 소유의 화물 트럭을 몰던 아버지가 차를 주차하던 곳이기도 했다. 동네 간을 잇는 다리가 있고 넉넉한 폭의 물길이 흐르던 그곳. 나의 여름의 기억의 일부는 천 위의 다리 위에서 불어난 물을 보는 아버지로 기록된다.


어디야 밥 먹었어 거기도 비가 많이 와 여기는 비가 오다가 그쳤네


수식 없이 필수적인 성분으로만 구성된 대화가 오고 가는 수일 간격의 전화. 물이 넘치는 날, 아버지는 나의 뜸한 전화를 받을 때면 그곳에 계시곤 했다. 비는 아버지의 일을 막았기에 며칠씩 보름씩 아버지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뭐 하고 있냐는 물음을 던지면, 아버지는 고수부지에 나와 물구경을 한다고 했다. 빠른 유속으로 넘쳐흐르는 천을 그저 바라보고 있다고. 물 위로 새물이 겹치고 새물 위에 또 물이 겹쳐 흐르는 오래된 응시.


해가 쌓여도 그 이유는 차마 묻지 못한다. 아버지의 영역이자 아버지의 시간이었기에. 몇 해 전 있었던 가슴 아픈 일을 상념 하였을까. 물은 범람하여도 전화 너머 아버지에게 건네는 말은 가문다. 흐르고 흐르고 또 흘러가는 물을 아버지는 왜 그토록 바라보러 갔을까. 물 곁에, 천 곁에, 강 곁에. 묻어둘 수 없는 그 생의 깊이를 나는 또 큰 들숨으로 묻는다. 아버지는 그곳에 서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물이 불어나면, 또 태풍우가 몰아칠 것이라는 걸.

서른 해가 지나고 여름이 끝날 때쯤이면 한 가지 안부가 바람결에 실렸다. 언젠가부터 멀리 떨어져 지내는 아버지를 위해. 몇 날 며칠을 도로 위에 잠들고, 그렇지 않은 날엔 물가에 가있는 아버지를 위해.


그곳에는 폭우가 그쳤는지.


4.

봄, 3월 생으로 나서 7월이 펼치는 모든 생을 좋아했다. 아름답고도 잔혹한 사랑의 기억이 존재했기에 더욱 강렬히 좋아했다.


그러나 여름에는 유독 글쓰기가 빈약했다. 글을 낸 기록을 봐도 여름은 단식처럼 비어있다. 글쓰기를 중심으로 삼는 사람으로서는 심한 체증에 걸린 터였다. 도로 위에 들끓는 아지랑이와 함께, 번져가는 푸른 나뭇잎과 함께 문장이 수만 개의 기포처럼 떠올랐지만 엮지 못하고 사라지게 두었다. 내 안에서 난 것이므로 언젠가 어떤 까닭으로 다시 등장할 법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으로 땀을 흘리며 생활의 씬 하나하나를 살았다.


글쓰기를 뜸하게 두고서 굵은 땀방울로 힘껏 살아내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체력을 소진하며 먼 거리를 지치는 줄도 모르고 휘젓고 다녔다. 하루를 온전히 열심히 살아내고 나면 지쳐 나가떨어져서 깊은 잠에 빠지곤 했다. 밤중에 한 번 깨지 않는 잠을 푸지게 자는 것으로 여름밤을 보냈다. 한껏 소진하고, 다시 충전하는 일상이 복되고 건강하게 느껴졌다. 생활에 성실하고, 삶을 사랑한다는 증거였으므로.


5.

고백하자면 추운 괴로움이 없어서 여름이 좋았다. 나의 몸과 마음은 여름 볕에 따라가 붙었다. 추위 입은 마음을 덥혀 주기를 바랐다. 낮에도 밤에도 살갗만큼은 춥지 않아서 여름이 좋았다. 폭염에 가만히 나 앉아 볕을 흡수하면 밑부터 에너지가 차올랐다. 몇 년 치의 햇빛을 받아도 좋을 만큼 나는 인정해야 했다. 나는 추위에 취약하다는 것을. 그리고 누구라도 보내는 단편적인 다정함에 목 매달아, 습관처럼 나를 내던져 왔음을 말이다.


6.

아버지를 본 지 또 오랜 시간이 지났다. 아무렇지 않다가도 아버지가 없다고 생각하면 불쑥 눈물이 핑 돈다. 오랜 만에 얼굴을 맞대도 짧은 외마디의 말 밖에는 오가지 않는 사이. 사랑한다는 말을 아껴 보고 싶다는 말을 뱉는다. 보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을 때 그 언젠가 아버지가 듣지 못하실 때가 올까. 그러할 것이다.


7.

7월에 나는 힘껏 사랑을 했고, 힘껏 그리워했다. 매해 더한 정점을 견디며 청춘의 획을 그어 왔다. 쏟아진 물처럼 사랑은 저질러졌고 이별은 겨우겨우 수습되었다. 여름이 폭력과도 같이 느껴질 때쯤 사랑의 태생, 그것의 윤곽이 어렴풋이 잡히기 시작했다. 십 년의 여름을 그렇게 지나왔다. 입추에 시작한 글을, 도저히 쓸 말이 잡히지 않던 이 글을 한 땀 한 땀씩 따와 백로가 지나서야 마친다. 여전히 마음만큼은 힘껏 사랑하고, 힘껏 그리워한다. 나는 지금 너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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