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를 위한 물을 끓이며

by KAKTUS

주전자를 씻어 물을 받았다

가스레인지 두 번째 화구에 주전자를 올린 후 가스불을 붙였다

물을 끓일 때면 주전자를 늘 그 자리에 두곤 했었다

실로 오랜만의 점화였다


창밖엔 바람이 세차게 부는 모양이었다

오후 다섯 시, 겨울 해가 길어져 어둠은 아직이다


찬장에는 오래된 알약이며 커피 같은 것이 티백들 사이에 뒤섞여 있었다


유효기간이 지나지 않았지만 유효하지 않은 것들

그 자리에 있었으나 그대로 잊어버린 것들

다시는 손이 가지 않을 것들


우리는 방치된 것의 시간을 너무도 잘 망각한다

잊음으로 방치된 것일 수도


어지러운 찬장 속에서 홍차 티백을 하나 집어 들었다

스리랑카에서 온 그 티백에는 작은 스테이플러 심이 박혀 있었다

나는 언제나 그 철심이 뜨거운 물에 닿지 않도록 조심조심 티백을 우려냈었다


물에 닿기라도 하면 앗 하고 정적을 깨는 혼잣말을 했다

시대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 웃기도 했다

홍차 티백에는 그런 기억이 있었다


물이 끓는 동안 싱크대 서랍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마음도 따라 가라앉으며 평화로워졌다


주방에서 본 각도에는 내가 꾸려온 생활이 배열되어 있었다

어딘지 오늘까지 최선을 다한 것이 느껴졌다

포기하지 않으려는 노력이랄까

그럼에도 그 모든 노력을 전복하고

우울은 삼킬 듯이 나를 전염시켰다


별일 없이 나는 며칠간 흥청망청인 채로

최선을 다하는 삶을 포기하곤 했다


편지. 편지를 다시 읽은 것은 이틀 전이었다

릴케의 시집을 꺼내다가 그 편지를 발견했다


담대하고 대담하게 살아가자는 말을 남긴 너는

나를 얼마나 사랑했던 것일까


사랑이 깊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청춘의 일임을 절실히 깨달아 왔다


편지가 시간을 뒤집고 방치된 사이

여러 번의 다짐은 식었고 의지는 지루해졌다

이유 없이 무력해지고 쓸쓸해졌다


간헐적으로 세상이 좋았고

간헐적으로 세상으로부터 숨고 싶었다


세상은 모르는 나만이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치치치치 치치치치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데 가스레인지의 스파크 소리가 귀에 남는다


반가웠다 그 소리가

점화는 꼭 내 마음에도 일어났다

등줄기부터 열이 오르고 시작했다


편지 때문은 아닐 것이다

좀처럼 어린 날의 추억은 몰려오지 않았으니까

너를 보고 싶다는 감정의 결 역시 깨어나지 않았으니까


네가 보고 싶지도, 네게 길을 묻고 싶지도 않았다


너의 편지 속 한 줄만 남아 대담하게 살고 싶어 졌다

우리는 오늘이라는 마지막 순간순간을 밀어 연장하며 살고 있고 나 역시 그래 왔다는 사실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오로지 그 이유만으로도 대담하게 살 이유는 충분했다 이제는 좀 더 현명하기를 바라면서


아직 세상은 탐험하는 것이고

발견되지 못한 나의 모습이 많게 느껴졌다


간헐적이라는 말은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나는 계속 이어져 왔으니까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으니까


이런 나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일찌감치 물은 끓고 있고 나는 가슴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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