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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KTUS Jun 09. 2021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1

형광등을 껐다 켰다 껐다 켰다

벌써 십 분째 같은 자리에 서서

방안의 형광등 스위치만 누르고 있다


눈이 부셨다가 빛이 꺼진다

불은 들어오나 정신은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홀을 두고 살아왔다

사실상 언제 그 홀에 빠질지 모른 채 살아간다


그 홀에 들어가면 길을 잃는다

잘 걸어왔다고 생각하는 길도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사라진다


우주에 블랙홀이 있다면

사람에게는 발 밑의 홀이 있다


검어보이지만 그것이 무슨 색인지는 알 수 없다


이유야 붙이면 그럴듯하게 나오겠지만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그 홀은

나의 그림자처럼 놓이기도 한다


상처가 깊었다는 이유로

조금은 억울한 인생이다


2

진짜 길을 잃으면 어둠을 더듬어 볼 수도 없다


어둠이 안개 같은 것이라면

한 줌의 습기라도 쥐어질 텐데

작은 물방울조차 없다

그렇게 어둠에 말라간다


진짜 길을 잃으면 말을 할 수 조차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세상이 무거워진다


길을 찾고자 하는 의지도 꺾이고야 만다

바닥에 곤두박여 헤쳐 온 길을 잊는다

잊는다는 것은 어느 정도 잃어버리는 일이다


그럴 때면,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이 조금은 경이롭게 느껴진다


지하철을 타거나

서점에 가거나

공원에 나가 볕을 마주하거나

브런치를 먹거나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설거지와 빨래를 밀리지 않거나

꽃시장에 들르거나

베란다에 놓인 화분에 물을 주거나

예보에 맞춰 우산을 챙기거나

가도 안 가도 그만인 사진전을 예약하거나

누군가와 몇십 분 통화를 하거나

레시피를 보며 요리를 하거나

정시에 출근을 해서 정시에 퇴근을 한다거나

저녁 약속을 잡는다던가


이런 일이 매우 쉽게 일어난다는 것에

조금은 항복하게 된다


나에게 매우 어려운 일들이

그들에게는 어려울 것 하나 없는 일처럼 보이니까 말이다


3

사랑은 모든 방식을 만든다

말을 걸고 고마움을 느끼고 웃음 짓고 눈물 흘리며

그리워하는 모든 방식을 만든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대로 사랑하고

각자의 방식대로 사랑받는다


사랑을 잃어버리면 그 모든 방식을 잃어버리게 된다

사랑 하나가 한 사람의 전부인 방식을 끌고 간다


아무래도 발 밑에 놓인 홀로 들어가는 것 같다

그러나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알 수 있는 것은 사랑을 잃은 후, 가장 오래 묵게 되는 곳이 그 홀이라는 것이다


4

사랑이 없은 지 오래되었다

마음은 말랐고 몸은 사랑의 감각을 기억하지 못했다


많은 문제들이 야기됐다 역병처럼

나의 온 마을이 들쑤셔졌다


가장 먼저 혼자 하는 일이 하나씩 지루해졌다

혼자서  무언가를 한다는 일에 재미가 붙지 않았다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일주일이 되었다

하나둘씩 지루해지던 일들은 이내 지겨워졌다


지겹다는 것은 쉽게 돌이킬 수 없음을 뜻한다


무언가 지겨워졌다는 것은

나 역시 곧 그것에게 등 돌려질 것을 말한다

이미 등져있을지도


종일을 몸을 일으키지 못하며

단순한 생활도 겨우겨우 해가며

사랑 안에서 길을 잃고자 했던 패기를 후회했다

후회해도 돌이켜지는 것은 없었다


사랑 안에서 길을 잃으면

많은 것을 배울 줄 알았다


넓어지고 유연해지며 감정이 조금은 쉬워질 줄 알았다


그렇지 않았다 까마득 길은 지워졌다

설익은 이기심과 굳은 방어 기제만 남았을 뿐

무엇을 배웠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나만 빼고 무구했고 나만 유구한 것 같았다


5

계절의 길목은 사랑의 행방을 묻곤 한다

이것 역시 오래된 관습이다

사랑은 내게 드나들지 않는다

온다면 꼭 슬픈 일 하나를 품고 온다


상실은 그렇게 반복되었다


꺼진 눈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게 싫었다

눈은 사랑에 대하여 거짓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껍데기뿐이던 봄이 가고 초여름이 찾아왔다

여름에는 일부러라도 말을 뱉어본다

말을 하지 않으면 더위에 짓눌리기 때문이다


6

관심이 없었지만 개기월식이 일어난다고 했다


무표정하던 생활에 개기월식은 크고 또렷한 사건이었다

지구의 그림자에 보름달이 완전히 가려지는 현상을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일까


나는 오랜만에 밤하늘을 올려다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개기월식이 일어난다고 들었을 때 나는 은밀한 마음이 들었다

밤하늘의 달이 잠시 사라졌을 때, 그 달을 내 방에 가져다 두고 싶었다

틈새를 타서 달이 내 방으로 와서 숨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럼 엉망진창인 지금의 나도 조금은 괜찮아질 것 같았다


달이 말이 없어도 웃지 않아도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좋을 일이었다

그저 내 방 한가운데 놓여주길 바랐다


나는 물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은 어디 있냐고


아니 무언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잘못한 것이 많아 사랑을 잃어버렸는데 사랑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사랑이 없은지 한참이나 되었다고 말이다


아무래도 나를 잊고 길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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