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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KTUS Apr 06. 2017

퍽이나 신파의 종말


나는 신파를 건드리지 않고 이 글을 쓰려 한다.

이 글의 본질과 목표는 신파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파,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우리는 그 두 글자를 그리 멀리하는 것일까?


신파는 촌스럽고 뻔하고 구질구질하다. 

신파는 세련되지 못한 B급이고, 억지 감동을 만들어서 괜한 눈물만 쥐어 짜낸다. 

구태여 억지 감동이 아니더라도 자연적인 감동을 자아내어 감정의 말단까지 건드려서, 결국엔 울리기라도 할 심산의 것이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다. 

완전히 동조를 하지는 않지만, 나 역시 그러한 신파의 성격 때문에 신파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결코 드라이한 인간이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니나, 

몸부림 쳐서 신파로부터 도망치려던 것은 아니나,

한 때 꽤나 신파에 젖어있던 나는 이제 신파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있다.


신파에 젖어있던 나는 신파를 좋아했던 것 같다.

그때에 나는 사력을 다해 울었던 것 같다. 아니 저절로 그러한 울음이 나를 덮쳤다.


.

.


그리고 최근에 내 자신을 위해 울었던 시간이 언제였던가? 조금 됐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눈물까지 사랑하지 않게 된 부류의 인간은 아니다.


나는 눈물을 좋아한다. 타인의 눈물을 좋아한다. 

나를 위해서 흘리는 눈물은 낯간지럽고 스스로에게 조금은 반항감까지 인다. 

나는 언젠가부터 나를 위해서 울지 않는다. 철저히 타인을 위해서 운다.


나를 위해서 울 이유는 더이상, 없.다.


.

.

스스로 울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스스로가 가엾고 불쌍해 충분히 울었다고 생각했을 때, 이제 울음을 그쳐도 된다고 생각했을 때,

그런데도 눈물이 흘러내릴 때, 나는 울지 않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많은 경우는 타인 앞에서 흘린 눈물이었으므로, 나는 이제 그만 가여움을 멈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쯤 되면 울음도 습관성이라고, 그래서 너는 지금 불행에 휩싸여 있냐고

슬픔이 너를 위해서만 공전하고 있는 것 같냐고⏤

내면 깊숙한 곳에서 날카로운 비판과 비웃음이 들려왔던 것이다. 


나는 그 비판과 비웃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울음 뒤에 오는 타당한 지적이었다.


몹시 서럽게 울었던 시절이 우스워지는 시점이 온다면, 같은 이유이리라. 


.

.

고백컨대, 나는 상처를 보듬는 동안 나는 진정 친구를 찾아 헤맸고, 모든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길 소원했다.

그렇게 한 소끔의 울음이 끓는 동안 나는 내게 씌인 멍에를 벗겨낼 수 있었다. 과연, 나는 행복해졌다. 


다시 카랑카랑하게 명랑해지기로 했다.
'눈물이 더이상 나오지가 않아서'가 아니라 '눈물을 멈추기로 해서'다.

우는 동안 그 정도의 힘이 내게 생겼던 것이다. 


더 이상, 내 자신을 가여워하지 않고 울지 않기로 하면서

신파에 손사레치고 청승에 낯부끄러워하는 새로운 습관 같은 것과 함께.


.

.


상처는 누구에게나 절대적인 것이다. 그것이 '타인이 아닌 자신의 마음의 살갗'을 찢기 때문에 절대적이다.

'아무는 것' 또한 자신의 살갗이기 때문에 고유하고 절대적이다. 거창하지 않아도, 상처는 언제나 거기에 개별자로 존재한다. 이 절대적인 구역에 접근할 수는 있어도, 언저리에 당도할 수는 있어도 결코 침범할 수 없다. 


그리고 상처의 또다른 속성이 '있다'. 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처에 깔려 '있다'.


상처는 철저히 개별자로 존재하는 동시에 보편적으로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곧 슬픔과 고통을 간직한 타인들의 뜰이 되는 것이다.


신파의 본질은 거기에 있다. 

우리는 슬픔의 뜰을 함께 거닐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저마다의 크기와 모양으로 아프다는 것.

'나만 아플 것'에서 '나만 아프지 않다는 것'



한 나절을 거닐다가 외딴 걸음을 멈추고 각자가 서있는 곳에서

저 멀리 서녘에 지는 석양을 바라보면 그렇게 시간이 야속하게 흘러있다는 것.


붉은 석양빛이 각자의 얼굴로 떨어지고, 빛 속에 잠긴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 

이 드라마 같은 신파는 지나치게 신파적이면서 더이상 신파가 아니게 된다. 그렇게 된다.


"우리의 인생 모두가 쉽지 않지 않던가"


.

.

한참을 울고 났더니, 저기 뜰 한 구석에 석양을 등지고 울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저기 보였다.


나는 울지 않고 있었다. 나를 위해서 울 이유가 없어졌다.

그렇게 나는 신파 한 가운데서 신파롭지 않기로 하였다. 

굳건히 생에 대한 의지가 올랐고 쓰러진대도 당분간은 끄떡 없을 것 같았다. 


.

.

이제 답을 내려봐야 한다. 

우리는 왜 그토록 신파를 멀리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말이다.


계절이 바뀌어 신파는 꼭 폭설처럼 내린다. 굵은 눈발로 앞이 안보이도록 내린다. 

우리는 각자의 신파에 갇힌다. 그리고 각자의 신파만큼 아파한다. 

폭설의 시간에 속수무책으로 갇혀 우리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상처와 직면하게 된다.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이 그 폭설 속에 있다. 

우리는 폭설 속에서 그만 가여움을 멈추고, 숨을 고르고 비로소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한다.


이튿날 새벽, 뜰을 나서면 밤새 내린 눈이 가득 쌓여있다. 그냥 그런 것이다.


폭설에 갇혀 잠시 먹통이 되었던 시간, 그것이 우리의 생의 중심을 파고드는 신파의 본질이기도 하다.


.

.

그런데 우리는 아마 이러한 신파를 벗어던지고 탈출해야 할 굴레 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구질구질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아직도 타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본 적이 없는 듯 하기도 하다.

타인을 위해 마음으로 울어본 일 역시 없는 듯하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사람들의 방식은 참 B급이다. 

그들 스스로는 A급이라고 착각하겠지만 말이다. (웃음) 


신파는 굴레가 아니다. 신파는 타인에 대한 응시이면서, 상처의 치유학이기도 하다.

신파가 그토록 많은 눈물을 필요로 하는 이유이다. 


명랑해지기 위해서는 신파의 시간이 필요하다.

지천에 널린 슬픔처럼, 폭설에 갇힌 한 인간처럼.


신파를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그것을 구태여 멀리할 이유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만을 향했던 시선을 타인에게 던져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에서 신파가 자연스러워진다. 역설적이게도 그까짓 거, 대수롭지 않아진다.



그때 신파는 그곳에서 종말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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