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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KTUS Apr 06. 2017

나를 침묵으로 보내주어 고맙네, 당신


자박하게 비가 이틀째 이어지는 밤, 나는 이 비가 그치면 조만간 여름이 올 것을 예감한다.


녹음들은 물기를 빨아 들여 더 푸르게 빛을 낼 것이다. 더 건강하게 오월의 햇살을 맞닥뜨릴 수 있을 것이다.

점점이 남방에 검게 찍히는 빗방울들을 맞으며,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 먹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지금 써 내려가는 이야기는, 내가 글을 쓰겠다는 이유만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여지는 것들이며, 수없이 스러지는 욕망들 중에서 길게 나를 지속하게 하는 속성의 것들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것들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어느 가을의 등이 바짝 뜨거워지던 뙤약볕을 기억한다.

논이 익어가는 어느 가을날,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서 아버지는 자신의 장모 되는 사람의 물건들을 태운다.

옥빛 한복이며, 몸빼바지, 버선과 속옷들, 겨울 내 입었던 잠바들과, 머리에 늘 동여매어져 있던 찌든 수건들, 파란색 고무재질의 신과 구두들.


말이 워낙에 없는 아버지는 불을 피워 놓고, 옷가지들과 신발들을 하나씩 불 속에 집어 넣는다.

툭툭⏤ 몸동작에는 어떠한 감정도 배어있지 않은 듯 하다. 그것이 아버지의 방식이다. 아버지는 늘 그렇게 말이 없다. 슬픔 앞에서도 아버지의 방식은 침묵과 그에 필요한 인내다.


아버지가 할머니의 두꺼운 굽이 달린 슬리퍼를 집어 넣었을 때다. 굽이 높은 슬리퍼는 고무거품을 내며 쪼그라들긴 하지만, 쉽게 타지 않는다. 화학성분이 연소되면서 검은 연기가 공기 중으로 피어오른다. 재와 함께⏤ 아버지는 타들어가는 뒷굽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바라본다. 목울대로 침이 삼켜지지도 않고, 타들어가는 검은 구덩이 자리를 긴 시간 바라본다. 최후의 물건을 떠나 보내는 이의 입에선 신음도 새어 나오지 않는다. 입은 단단히 다물어져 그의 눈빛만 망연하다.


    볕과 불과 망연함과 하늘을 팽팽 맴도는 잠자리들과, 오직 망자의 시간이다.


슬프도록 찬란한 가을 논밭이었다. 지독한 볕이었다.

메뚜기들이 놀음하고 잠자리들이 팽팽 공중을 도는 지루한 빛이 내리는 시간이었다.

망자는 울음을 뒤로 하고, 사위 앞에서 어떤 표정이었을는지.

우악스럽게 상실을 내뱉지 않고, 태연하고 결연하게 자신의 조각들을 버리는 사람 앞에서 조금이라도 고마웠을지.


    나를 이렇게 침묵으로 보내 주어, 고맙네 당신.


삶의 도처에서 그 장면은 나에게 끼어 들어, 조금만이라도 더 살게 한다. 이왕이면 더 열심히 나를 살게 만든다.

먼지처럼 가장 작은 자리에서, 가장 작은 몸짓으로, 한으로 똘똘 뭉쳐 살았던 이의 슬픈 작별.

누군가의 외로움과 삶의 통째의 괴로움을 짚어보는 일이 이렇게 아득할 수 있다니. 그것을 기꺼이 해낸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한 사람의 죽음은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한다. 보이지 않았던 이의 볼 수 없었던 죽음이, 많은 것들을 보게 할 때 우리는 한참을 헤매어 그것이 삶의 그물망에 남긴 의미들을 찾아내고, 오랫동안 사랑으로 그것을 기억하곤 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죽음 앞에서 해낼 수 있는 일이므로.


울음의 울타리 속에서도 침묵으로 일관해 자신의 장모의 마지막 넋까지도 긴 바라봄으로 참아주었던 한 사람도

어느 날, 한 계절이 한 계절에 가장 맞닿아 있을 때 그 계절의 숨을 들이쉬고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던 그 슬리퍼를 떠올릴 것이다. 그날, 그 가을볕이 얼마나건조했고 강렬했는지도.


가장 작은 자리에서 보통스럽게 자신의 몫을 맡은 이들을 두고, 나는 쉽게 나가 떨어지지 않으리라, 또 한 번 그들을 믿고 나를 믿어봐야 한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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